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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 헤르만 헤세

꼬마대장님 2018. 1. 2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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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

 

 

그는 장기간에 걸친 계획이나 약속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음날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그는 불편을 느꼈다. [각주:1]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일을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가정집에서 모든 사람들의 관대한 용납을 받는 귀여운 고양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부지런히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 걱정없이 우아하게, 화려할 정도로 당당하게 지내고 있는 모습과도 같았다. [각주:2]

 

그녀는 한동안 멈춰 선 채 그 아름다운 사내를 들여다보았다. 이 사내에 대해 그녀의 남편은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그녀는 그의 감긴 긴 두 눈 위로 매력적이고 밝은 이마 위에 그려진 짙은 눈썹과 좁지만 갈색을 띤 뺨, 매력적인 선홍색 입술과 갸름한 목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옥센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때때로 봄날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빠져 이런 멋진 낯선 청년의 사랑을 받아들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각주:3]

 

그는 위로 올라가 무두장이와 인사를 나눴다. 거실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었고, 밝은 색조의 나무 벽과 벽에 걸린 시계, 거울, 사진 등이 어우러져 친근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겨울에는 이렇게 깔끔한 거실도 나쁘지 않다고 크눌프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결혼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각주:4]

 

이봐, 재단사 친구, 자넨 성경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어. 무엇이 진리인지, 인생이 본래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일세, 내 생각은 그렇네. 성경은 오래된 책이지. 옛날 사람들은 우리가 오늘날엔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 모르고 있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성경 안에는 아주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거야, 진실한 이야기들도 아주 많이 들어 있고 말야. [각주:5]

 

그 대신 그는 다른 지방에서 있었던 새로운 사건들을 이야기해 주면서, 자신을 친지이자 친구로, 또한 공모자로서 그곳에 거주하는 명망 있는 사람들의 삶과 연결시켜 주는, 느슨하고 기분 좋은 연결 고리가 존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각주:6]

어색하고 낯선 서울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때와는 달리, 지금은 내게도 느슨하고 기분 좋은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 교직에 있는 선배, 동기 보다 서울에 계신 동교과 지인 샘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실감할 때 나도 일원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는 가정과 결혼의 행복에 대해 무두장이가 위엄 있게 이야기하던 것을 떠올리며 조금은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행복이나 미덕에 대해 자랑하고 뻐길 경우, 대부분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양복 수선공의 경건함도 예전엔 그랬던 것이다. 사람들이 어리석음 속에 빠져 있는 것을 구경할 수도 있고, 그들을 비웃거나 동정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결국 그들이 자신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각주:7]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그건 그렇고 소원이란 건 재미있는 면이 있어. 내가 만일 지금 이 순간 고개 한번 끄덕이는 걸로 멋지고 조그마한 소년이 될 수 있고, 자네는 고개 한번 끄덕이는 걸로 섬세하고 온화한 노인이 될 수 있다면, 우리들 중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걸. 그러고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할 거야. [각주:8]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항상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슨 말이냐면,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가 하나 있다고 해봐. 만일 지금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가 늙을 것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을 거야. 어떤 아름다운 것이 그 모습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난 그것을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걸. 이것은 언제든지 볼 수 잇는 것이다, 꼭 오늘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야. 반대로 연약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난 그것을 바라보게 되지. 그러면서 난 기쁨만 느끼는 게 아니라 동정심도 함께 느낀다네.

이 두 감정은 서로에게 연결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아? [각주:9]

 

계획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야. 사실 사람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거든. 실제로는 바로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매순간 아주 무분별하게 행동한다구. 친구가 된다거나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아마도 내가 말한 경우에 해당되겠지.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몫을 철저히 혼자서 지고 가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는 없는 거야. 누군가 죽었을 경우에도 그걸 알 수가 있지. 하루, 한 달, 또는 일 년 동안 사람들이 통곡하며 애도하겠지. 하지만 그러고 나면 죽은 자는 영원히 죽은 거야. 그 다음엔 그의 관 속에 고향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떠돌이 견습공이 누워 있다 해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이 되는 거야. [각주:10]

 

어쩌면 자네가 이야기한 것처럼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의지라는 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이 우리를 완전히 배제한 채로 저절로 진행된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이 몹시 상심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생기지. 하지만 사람들이 사악해지는 것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해도 한 가지 죄는 여전히 존재하게 될 걸세.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느낄 테니까. 그리고 선한 일을 하면 만족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도 없을 테니, 그러게 되면 선한 일이 바로 옳은 일이 될 수밖에 없고 말야. [각주:11]

 

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가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발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 저곳으로 불어댈 뿐이지. [각주:12]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인 <앙리할아버지와 나> 연극에서 나왔던 구절. 폴과 콘스탄스가 이야기하는 대목이 이 부분이었던 것 같다. 대동소이한 이유는 아마 번역의 차이겠지? 연극에서는 몰랐는데 읽으면서 정말 헤세같다-하고 느꼈던 부분.

 

난 종종 내 부모님들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부모님은 내가 그 분들의 자식이고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셔. 하지만 내가 그 분들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에게 난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인간일 뿐이야. 내게 중요한 일이고 어쩌면 내 영혼 자체일지도 모르는 일들을 부모님들은 하찮게 여기시고, 그것이 내가 어리거나 변덕스러운 탓이라고 돌려버리시는 거야. 그러면서도 그 분들은 나를 사랑하시고 기꺼이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주시지. 아버지는 그의 자식에게 코와 두 눈과 심지어는 이성까지도 물려줄 수 있지만 영혼은 아니야. 영혼은 모든 사람들 속에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지. [각주:13]

이 책을 읽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곳. 최근의 내가 가장 골몰히 생각하던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유되는 부분이 있구나를 새삼 느끼게 된 부분.

'영혼' 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실 나는 종교가 없는 집안의 종교가 없는 인간으로 자랐기에 영혼과 같은 것에 대해 천착한 적이 거의 없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 영혼이란 것을 많이 마주한 것은 임고 공부할 때 서양 중세 윤리 정도..? 그만큼이나 영혼은 나의 삶과 별개의 무엇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서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내가 당황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많은 인간의 각양각색을 영혼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하다. 나의 영혼 또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토록 달랐구나. 그래서 부딪히고 내가 영혼이 맞는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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