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 정멜멜

꼬마대장님 2024. 12. 31. 12:42
반응형
SMALL
격무에 치이다 퇴근해 찾은 술집과 카페들은 얼마나 그럴 듯하고 멋진지. 쾌적한 테이블 간격, 근사한 조명과 인테리어, 편안한 공기. 업무 보고나 긴 회의도 없고 어딘가 불편하지만 웃으며 매일 인사를 나눠야 하는 사람도 없는 곳. 확실히 그즈음의 나는 어떻게든 회사생활을 정리하면 삶의 질이 달라질 거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중국 호떡처럼 부풀어 있었다. 덩치가 크지만 안이 텅 비어 있어 한입 베어 물면 푹 하고 부서지는 허무한 그 빵 자체였다. 돌이켜보면 사회생활 경험이라곤 회사에 출퇴근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품을 수 있었던 생각들이다. 일은 방식이 어떻든 누구에게나 전쟁인 것을 지금은 안다.(27)

 

여러모로 엉성했다. 그러나 홈페이지는 이제 막 출발하는 사람들의 등을 가볍게 밀어준다고 생각한다. 올릴만한 작업이 없다 싶어도 만드는 것이 좋다. 주소를 선점하고 간단한 문구라도 걸어두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36)

 

불운은 나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잔혹할 정도로 포개어질 수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불운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108)

 

어딘가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듣는 말들은 내 주변 어딘가를 머물 뿐 바로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저 어떤 말이라도 건네려고 하는그 마음을 알아서 고마웠다. 한강이와 걷던 길, 한강이가 있던 장소에서 다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끔찍하면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108) 

 

먼저 태어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장녀의 장점도, 단점도 있지만 그 어느 쪽으로도분류할 수 없는 성가시고 귀찮은 느낌이 내내 있었다. 뭐든 미리 겪어본다는 것은 좀 어려웠다. 어떠한 조언이나 사례 없이 매 순간이 처음일 때,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조금씩 센스가 남다른 친구들은 늘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112)  

 

나름의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나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으러 나가고 싶어지는 사진도 무척 좋아한다. 나에게 좋은 창작물의 기준은 노래 부르고 싶어지는 노래, 글 쓰고 싶어지는 글, 그림 그리고 싶어지는 그림 같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러한 마음들이 불러 일으켜지는 누군가의 결과물들을 좋아한다. 비상하고, 위대하고,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의 창작물도 누군가는 만들어내야 하고 너무나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소비하지만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다. 반면 나는 역시 작은 세계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맞다. 압도하는 무언가보다는 가능하다면 "나도 뭔가 해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순환되는 창작을 하고 싶다. 여백이 있어서 잠시 머물 수 있는 사진, 가볍게 카메라를 들고 산책이라도 나가고 싶게 하는 사진이 지금까지는 나의 목표다. 잔잔한 무언가를 별 탈 없이, 오래 오래 만들어내길 바란다. (263) 

 

무섭고 긴 밤이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 중 가장 싫은 순간에 대한 질문에 '차에서 내릴 때'라고 답변했다는 일화를 떠올린다. 차에서 내리면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부터 촬영장을 진두지휘해야 하니까. <죠스>와 <ET>의 아버지, <환상 특급>과 <백 투 더 퓨처>의 감독,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거장조차도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모양이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이다. 저 대단한 사람도 통과할 수밖에 없는 감정인데 나 같은 범인이 비켜갈 수 있을 리 없다고. 그가 TED에서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10가지 방법' 같은 타이틀을 달고 강연을 한들 저 한마디만큼 내게 위로가 될까. 다큐멘터리 <스코어>에 나온 작곡가 한스 짐머의 명언 "어떻게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그냥 다시 전화해서 다른 사람 쓰라고 할까..."를 생각하며 창작자들 각자의 공포와 두려움을 떠올려본다. 
힘 빼고 즐기며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고통스러워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천재도 거물도 무엇도 아닌 나는 결국 후자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결국은 모두가 불안과 공포를 모래주머니처럼다리에 묶고 무게를 이겨가며 터벅터벅 걸어 나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꺾이는 무릎으로라도 한발 한발 용기를 내서 나아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270)  

 

늘 많이 찍고 오래 찍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만 많이 찍는 것보다는 오래 찍는 사람에게 점점 더 무게를 싣게 된다. 왜냐면 오래 찍으려면 여러 가지를 섬세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재능도, 근력도, 기개도, 운도. 그래서 무리하는 습관을 조정하고 조금씩 더 쉬고, 덜 찍으며 가려고 한다. 철저하게 계획해서 오래오래 찍고 싶기 때문에. 반세기전의 기세 좋은 사진가처럼, 때로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흑백 사진 속에서 마가렛 버크화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인생과 경력은 우연이 아니었다. 철저히 숙고했다." (292) 

 

언제나 거대한 led 전광판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 누군가는 지나가다 고개를 들어 발견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뭔가를 전송한다. 이제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업무 의뢰가 들어온다 해도, 그 양과 별개로 내가 해온, 또 하고 있는 일을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므로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작업물을 올리는 편이다. 중요한 건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리듬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는 그 자체로 나의 중요한 궤적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 함께 일해보고 싶은 업체에 먼저 메일을 보내거나 하는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스스로의 자취를 단단히 만들어두는 데에 공을 들이는 것도 괜찮다. 잘 모아두고 분류해두면 누구든 알아보게 되어 있다. (299)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