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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 안보윤 외
꼬마대장님
2023. 10. 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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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진심 :: 안보윤
유란은 여전히 진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진심은 왜 그렇게 빨리 변질될까. 이서는 다른 씨앗보다 금세 발아했다. 떡잎이 아닌 넝쿨에 가까운 것을 내밀어 유란을 휘감아왔다. 유란은 그런 이서의 의존과 맹목이 부담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진심 같았다. 유란은 쓰고 있던 글자들을 서둘러 지웠다. 어떤 진심은 진심이라서 한심했다. 어떤 진심은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속 복숭아처럼 쇠 냄새를 풍기며 삭았다. 어떤 진심은 추해졌고 어떤 진심은 다만 견뎌내는 삶으로 전락했다. (23)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 안보윤
경찰이 흥얼대며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이상하게 친근하고 이상하게 여유로워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기이한 공조가 하진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같이 출동한 경찰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남자가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남자가 훌쩍거리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하진이 아니라 경찰을 향해서였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 젊은 사람이 말이야.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거야. 경찰이 남자를 다독이고, 남자가 경찰의 훈계에 고개를 끄덕이며 굽신대는 모습을 하진은 기가 막힌 채 바라보았다. 경찰이 왜 남자의 사랑을 대변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왜 자신이 아닌 처음 보는 경찰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받고 있을까. 하진의 집에 불법 침입이 일어났고 하진이 신고해 범인을 잡았음에도 모든 처리 과정에서 정작 하진만이 배제된 느낌이었다. (37)
남자가 여기, 이 침대에 앉아서 울었나?
여기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았나? 저 의자에 발을 얹고 누워 고함을 질렀을까? 방 안의 모든 사물이 돌연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남자의 흔적이, 체액이, 지문과 체온과 축축한 숨 같은 것이 남아 집요하게 하진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하진은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몸을 숨길 수 없었다. 남자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하진의 집 안 모든 곳에.
현장을 잡겠다는 오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곳은 현장 같은 게 아니라 하진의 공간이었다. 하진이 무방비하게 몸을 펼친 채 시간을 부리고 일상을 누비던, 하진과 완전히 밀착된 삶의 공간이었다. 하진은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 속에서 깨달았다. 남자의 침입으로 인해 하진은 자신만의 내밀한 공간을 상실했다. 남자는 아무것도 부수지 않는 방식으로 하진의 공간을 완전히 훼손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딱 한 번만의 침입만으로. (40)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인데도 자꾸 자신이 없어졌다. 남자는 조교직에서 해임되면 그뿐이었다. 징계위원회가 열린다 해도 기껏해야 경고일 게 뻔했다. 그것에 비해 하진이 각오해야 할 것들은 너무 많았다. 무엇보다 남자는, 하진의 집을 알고 있었다. (56)
표정 없이 견고해진 얼굴이 구운 도자기 같았다. 매끈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터무니없이 쉽게 깨지는 흙색의 도자기 가면. 하진은 구운 호떡을 들고 조금씩 베어 먹었다. 잠깐 사이 안에 든 설탕이 미지근하게 굳어 서걱거렸다.
그런 건 용서가 아니야. 하진은 엄마에게 말했다. 10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말할 수 있었다.
엄마, 내 침묵은 용서가 아니야. 내 침묵은 나를 위한 거였어.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가 지금까지는 침묵밖에 없었던 것뿐이야. 나는 계속, 계속. 하진이 호떡을 씹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났다. 나는 계속, 늘, 엄마가 두려웠어요. 정말이지 엄마가 끔찍했어. (59)
내 할머니의 모든 것 :: 문진영
배정심 여사가 고양이와 닮았다면, 나의 친할머니는 마치 골든레트리버 같았다. 실제로 그녀는 나를 '내 강아지'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서 조건 없는 환대와 사랑을 받았다. 그녀에게 안기면 푹신하고 따듯했다. 할머니가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거나,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런 상상조차 할 필요가 없는 안전한 관계. 그런 관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77)
지형에게서 내가 누리고 있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삿날 저녁, 우리는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계약서를 썼다. 나의 조건을 이러했다. 사생활에 일절 간섭하지 말 것. 즉, 서로를 하우스메이트처럼 대할 것. 엄마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좋아, 그럼 나도 조건을 걸지. 모든 공과금과 식비의 절반을 낼 것. 엄마는 매달 말일 내가 지불해야 할 액수를 포스트잇에 적어 내 방문에 붙여놓았다. 다른 조건도 있었다.
과거를 인용해 엄마를 비난하지 않을 것.
각자의 불행은 각자가 책임질 것.
엄마는 그동안 자신의 불행을 내게 전염시킨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75)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 박지영
무언가를 하는 데도 비용이 지불되지만 하지 않는 데에도 비용이 지불된다는 것, 때로는 하지 않는데에 더 큰 가치가 매겨진다는 것을 강선동은 알게 되었다. (101)
엉킨 소매 :: 이서수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만날 걸 그랬다. 그땐 이런 얘기가 화제에 오를 리 없고, 나는 끊임없이 다른 얘기를 할 텐데. 하지만 그걸 인식하는 순간 편안함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솔직하게 말하고 계속 얼굴을 보기로 한 것인데, 그런 선택이 자꾸 이렇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주영 씨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나는 너한테 솔직하고 싶어. 속이는 거 없이 만나고 싶어.
나도 그래.
... 나도 그랬어. 근데 그게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해정의 말에 우리는 길게 침묵했다. (151)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 :: 윤보인
왜 하필 사랑이라는 건 그렇게 젊을 때 찾아오는 것인지, 훗날 자리 잡았을 때 오는 게 아니라, 부서질 것같이, 죽을 것같이 위태로운 시기에, 미칠 것 같은 시기에 찾아와 나를 괴롭히는 것인지 알지 못해서, 그 시절 나는 자취방으로 돌아와 울곤 했다.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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