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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가 작품이 될 때 :: 박보나

꼬마대장님 2023. 10. 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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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아사다 아키라는 그의 책 <도주론>에서 인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과거의 모든 일을 짊어지고 적분처럼 통합하는 편집증형 인간과 매번 새로운 제로 시점에서 미분의 차이를 가지는 분열증형 인간. 아사다 아키라에 따르면, 편집증형 인간은 축적, 정주, 중심, 다수, 전체를 추구하며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반면에 분열증형 인간은 도박, 주변, 소수, 야성, 잡종의 성질에 가깝다. (7)

 

다른 강호인들이 무림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갈등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놀이'를 선택해서 온몸을 흔들어 웃어젖히는 주백통처럼, 아더르의 흐느낌도 세상의 규칙과 속도와 상관없이 '떨어지고 사라지기'로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과 자신의 실존을 표현한 것이리라. (20)

 

강도가 흑인이었다는 내 증언에 용의자 측 변호사는 "어떤 피부색의 흑인이었나요?"라고 물었다. 흑인이라는 표현이 이미 특정한 피부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변호사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검은색이었다니까요. 그냥 흑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변호사는 흑인도 커피 갈색, 옅은 갈색, 진한 검은색, 푸른 검은색, 혹은 회색에 가까운 검은색 등 피부색이 다양하다고 말하면서 '그냥 흑인'은 없다고 지적했다. (중략) 모두가 똑같다는 생각은 조금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잘못된 구실이 된다. 세상에 '그냥 흑인'은 없다. 존중받아야 할 각기 다른 색의 개별 인격체들이 있을 뿐. (28)

 

나는 새로운 대통령을 원한다. 

두 명 중 덜 악랄한 자가 아닌 다른 대통령을 원한다.

자본과 권력의 비열한 사기꾼들을 나는 더 이상 대통령으로 원하지 않는다.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 (35)

 

박이소의 밥솥 퍼포먼스는 서구 중심의 미술계를 주변국인 한국의 작가로서 자신만의 속도와 보폭으로 건너가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투박하고 미미함며 느릴지라도 묵묵히 걸어가겠다는 작가의 단단한 선언이다. (38)

 

로만 온닥의 <좋은 때 좋은 기분>도 일상적 상황을 살짝 뒤튼 퍼포먼스다. 온닥은 퍼포머들을 고용하여 런던 프리즈 아트 페어의 VIP실 앞에 줄 세워놓는다. 줄 서는 문화가 익숙한 런던에서 이 퍼포먼스는 매일의 풍경과 다를 바 없다. 퍼포머들은 평범한 옷을 입고 있고, 그 어떤 예술적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냥 줄만 서고 있다. 그런데 그 점이 무섭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줄도 전혀 줄어들지 않고, 시간만 억겁처럼 느껴진다. 
'두려움'은 분명히 익숙한 것인데, 어딘가 약간 달라졌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심리 상태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쩐지 다르고 왠지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주는 심리적인 혼란과 충격은,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고 잘못된 원인을 찾으려 하는 인지의 단계로 이어진다. (중략) 온닥의 작품에서도 관객들은 불편과 혼란, 공포를 느끼다가 결국 깨닫게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퍼포먼스에 예술적 구성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무리 줄을 서 있어도 VIP실에 못 들어간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미술 퍼포먼스가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이라는 소름 끼치는 사실이라는 것을. 작가는 일상적인 상황을 미술 안으로 슬며시 가져옴으로써 관객에게 자본에 따른 계급의 위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50)

 

너무 거대한 이야기와 너무 반짝이는 작품이 좋은 환기의 순간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익숙한 것이 살짝 어긋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두려움은 흥미로운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51)

 

오스카 산틸란의 <침략자>에서도 관념의 세계와 실제 세계가 만나는 순간이 있다. 산틸란은 영국에서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대략 3센티미터 크기의 돌을 하나 주워와서는 영국을 아주 미세하게 줄였다고 말했다. 이 작은 제스처는 영국에서 상당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부정적 반응의 원인은 작가가 자연을 훼손했다라기보다는 감히 영국의 크기를 줄였다는 데 있었던 것 같다. 산틸란은 전시장을 폭파시키겠다는 전화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산틸란이 주워온 돌은 매우 작지만 아주 무겁게 받아들여진다. 관념의 세계가 실제 세계로 침입하면서 지각의 균열을 만들어낸다. 작은 돌 하나를 가져오는 제스처가 한 국가의 실제 면적을 줄였고, 그 나라의 정신과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실재가 되면서 드러나는 상황이 상당히 모순적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실컷 침략했던 유럽인들이 반대로 에콰도르 작가가 영국을 3센티미터 줄였다는 것에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실소가 터져 나온다. (61)

 

우창이 읽는 글은 열네 살 때 자폐증 진단을 받은 후 자폐증 환자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미국 사회운동가 어맨다 백스가 유튜브에 올린 <나의 언어>에서 가져온 것이다. 8분 길이의 이 영상 전반부에서 백스는 반복적으로 낮은음을 읊조리기도 하고 사물을 계속 만지는 등 일반적으로 자폐증 환자의 병리적 증상으로 인식되는 행동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상 후반부에서 백스는 자신의 행동을 친절하게 번역해주면서 우리의 안일한 편견을 뒤엎는다. 세상에는 '말' 이외에 다양한 생각과 사고방식,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러한 방법을 '비정상'이라고 부르며 그렇게 소통하는 사람들을 아프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을 비판한다. (65)

 

오노 요코와 우창의 퍼포먼스, 그리고 어맨다 백스의 비디오가 보여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라는 공통된 주제는 지금의 페미니즘이 왜 다양한 소수자 및 주변부와 함께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개념인지 설명해준다. 사회 구조의 중심과 주변을 읽어낸다는 것은 다른 지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주의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시작이다. (67)

 

이 작품의 제목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장영혜중공업은 이 문장을 작품에 반대로 적용한다. (한국의)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고. 서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 돈과 성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가정은 모두 불행하다로 읽힌다. 
다른 비디오 작품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는 삼성 병원에서 태어나 삼성 전자제품을 쓰고, 삼성 아파트에 살기 위해 평생을 일하고, 삼성 보험에 미래를 설계당하고, 삼성 장례식장에서 죽는 '삼성 인생' 이야기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삼성을 위해 돈을 벌고 삼성을 위해 쓰게 되는 구조가 새삼 섬뜩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대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상당히 공포스럽다. 심지어 모든 것이 탈탈 털리는 이러한 착취 구조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물질과 자본만을 절실히 욕망한다는 것이 제일 끔찍하다. (93)

 

쿠르디의 사진은 분명히 시리아 내전과 난민에 대한 의미 있는 관심과 반응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임시적일지언정 비극적인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환기의 기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든 지금, 여전히 시리아의 상황은 끔찍하고, 더 많은 아이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시리아로부터 멀고 안전하다. 이것은 비극적인 이미지를 통해 타인을 엿보고, 그들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102)

 

귀신은 우리의 역사다. 외계인과 사뭇 다르다. 귀신은 국가 권력과 사회적 폭력으로 죽임을 당하고 밀려난 우리의 조상이며 이웃이다. 따라서 귀신을 자꾸 이야기하고,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중요하다. 이 보이지 않는 타자들에게 공감하고 이들과 화해를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지금 상황과 문제를 알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 이들이 왜 억울하게 귀신이 되었는지, 무엇이 정말 무서운 것인지가 보인다. (118)

 

미국도 전쟁을 아름답게 표현하곤 한다. 2017년 북한과 미국 간에 긴장이 고조됐을 때, 주한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면 전쟁 시작이라는 소문이 농담처럼 돌았다고 한다. 이 노래는 미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할 때 실제로 작전 신호로 쓰였다.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니, 미국의 군사 신호는 퍽이나 로맨틱하다. 
파괴와 살상을 농담이나 은유로 전달하는 태도와 관점이 섬뜩하다. 얀 보의 작품처럼 예술로 전쟁과 폭력을 비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잔인함과 참혹함을 가리기 위해 전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끔찍하다. (126)

 

기대와 애정이 있는 만큼 이전보다 더 다양한 목소리들이 들린다. 그리고 다른 목소리들이 잘 들리는 만큼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도 더 많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춤을 추기 때문에 더 많이 부딪히고 더 자주 어긋난다. 당연히 '낯설고 친밀한' 타인들과 춤을 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지금 헤드폰을 쓰고 혼자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같은 시간 속에서 여러 사건들을 함께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할 수 없더라도, 사실 너무 달라서 많이 낯설고 불편하더라도, 하산 칸의 비디오 속 두 남자처럼, 이집트 국민들처럼, 새로운 역사 줄기 안에서 여전히 우리가 함께 춤추는 중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133)

 

함께 춤을 출 때는 상대방의 동작을 지켜보고 기다리면서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의 호흡을 느끼며 자신의 스텝을 뒤로 물리기도 하고, 손을 잡아 다른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어야 한다. 완벽한 통제가 필요한 매스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자유로운 움직임을 좀 더 지켜보고 더 많이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증오와 분열을 동력으로 삼았던 지난 정권의 시간과 달리,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고 내 몫을 같이 나누며, 열린 마음으로 다른 목소리와 대화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꽤 근사한 춤을 계속 함께 출 수 있지 않을까? (134)

 

 

요즘 서점에서 많이 보이는 결의 제목 때문에, 가벼운 책일 거라 지레 짐작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아름다운 책이었고, 그래서 봄부장님께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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