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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 권여선

꼬마대장님 2023. 7. 2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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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식 문답

진지하게 묻는다, 준희야. 너한테 나는 뭐냐? 정원이하고 경애는 뭐냐? 너는 진짜 술 먹으면 궁중 비화에 나오는 이상한 내시나 상궁들 있지, 딱 그렇다. 갈등과 암투만 먹고 사는 인간 같다. 거기에 상관없는 우리까지 휘몰아 넣는다. 준희 너도 다 알면서 그런다. 어렸을 때 아무도 안 받아줘서 뒤늦게 응석 부리는 건 알겠는데, 한 일 년 반 했으면 됐지, 우리 이제 곧 3학년이 될 텐데 더 질질 끌래? 그래, 너도 뭐 언젠가는 질릴 날이 오겠지. 난 그래서 별로 네 걱정은 안 한다. 너는 잘 살 거다. (16)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36)

 

언제까지 질질 끌래, 부영이 묻고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40)

 

 


하늘 높이 아름답게

성당 안뜰 파라솔 아래에 앉아 베르타는 곧 참회해야 할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뭐가 만족스러운 걸까. 쉬지 않고 떠들어대면서 이들이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88)

 

이제 베르타를 괴롭히는 의문은 자신이 왜 이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이렇게 해서 뭐가 만족스러운 건가, 베르타는 신음하듯 생각했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말을 떠들어대면서 도대체 어떤 기쁨을 느끼는 걸까. 가만히 듣는 것보다 열심히 말하는 게 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그게 더 살아 있는 것 같아서? (92)

 

그날 새벽 내내 잠을 설친 탓에 베르타는 마리아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몸부터 일으키자 하니 일어나졌고 일어나니 이내 침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욕실로 가자 하니 욕실 쪽으로 발이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마리아의 말대로였다.
몸이란 게 움직이자 달래면 움직여져요, 사모님. (103)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익아, 너 원채가 뭔지 아니?
어머니가 물었다. 어떤 말은, 특정 음식이 인체에 계속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정신에 그렇게 반복적인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오익은 생각했다. 말의 독성은 음식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음식은 기피할 의지만 있다면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을 일으킨 말은 아무리 기피하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피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점점 더 그 말에 사로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된다. 원채는 다 갚기 전에는 절대 안 없어진다고,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익은 그게 바로 사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기피 의지와 기피 불가능성이 정비례하는, 그런 원채 같은 무서운 말과 일들이 원채처럼 쌓여가는. (172)

 

 


기억의 왈츠

하지만 원래 그렇더라도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다.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놀랍지 않다면 무엇이 놀라울까. 시간이 내 삶에서 나를 이토록 타인처럼, 무력한 관객처럼 만든다는 게. (204)

 

자다 가끔 경련을 일으키며 깨어날 때가 있다. 누구나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최소한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그 처참한 비열함이라든가 차디찬 무심함을 어느 정도 가공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그렇게 했다. 경서와 내가 멀어지게 된 데 특별한 이유나 계기는 없었다고 생각했으니까. (230)

 

내가 그 수박을 먹은 기억은 없다. 그 비싼 수박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쭈박, 쭈박, 하고 울면서 내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없는 걸 요구해서 상대를 끝내 시험에 들게 해 그걸 얻어내고 말겠다는, 결국 이겨먹고 말겠다는 그 악착한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선물을 헌신짝 버리듯 쉽게 잊고 그 선물을 준 사람마저 이겨먹었으니까, 먹어버리듯 이겼으니까 까맣게 잊고 마는 그 잔혹한 무심함은. (233)

 

 


영원회귀의 노래 :: 권희철

질문하는 사람에게 상대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형식 자체가 상대방을 따져보는 시선 아래 노출시키고 해명하는 입장에 처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다. 질문에 특별히 뾰족한 구석이 없는데도 또 거기에 대답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닌데도 때때로 우리가 질문을 받고 맥락 없이 불안이나 모욕을 느끼는 데 근거가 없지 않은 것이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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