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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름들 :: 안윤
꼬마대장님
2023. 6. 22.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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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언젠가 넌 네 돋보기 안경이 네 인생의 주제이자 한계라고 말했었지. 나는 그것이 널 더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함께 살 때 그 말을 해주지 못했더구나. 모든 결핍은 아름다울 자격이 있지.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1)
나는 늙어가고 있고 죽음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으로 서서히 나를 지우고 있다. 병원 복도에서, 공원 벤치나 버스 구석자리에서, 때로는 벌거벗은 채로 욕조에 누워서, 내가 살아 있는 시간을 성실하게 지워간다. 내가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것이 살아감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내 기억이 한꺼번에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에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삶이 다만 지연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 다행을 누군가와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내 몫으로 주어진 다행일 뿐이다. (35)
내가 말하는 희망은 환자들이 병을 극복할 것이라는, 온전한 육체로 회복되거나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막연해서 결국 절벽과 같은 슬픔으로 떠밀리고 마는 그런 희망이 아니다. 그들이 언젠가는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 고통을 견디는 동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숨쉬며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 차라리 체념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희망이다. (42)
왼쪽 팔과 어깨가 참을 수 없이 저려왔다. 익숙하지만 새로운 통증이었다. 어떤 일들은 익숙하면서 동시에 새로울 수도 있단느 걸 나는 통증으로부터 다시 배운다. 우리는 배우고 싶지 않은 일들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배운다. 언제나 그래왔다. (48)
지금까지도 나는 믿음을 향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그렇게 고귀하고 드높은 곳에 있지는 않다고 여길 따름이다. 삶의 신비는 사람인 우리가 결코 엄밀하고 어긋남 없는 수준의 객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볼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세상과 동떨어진 외로운 사람들, 적요와 고독 속에 파묻혀 오롯이 혼자라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신이 있다면 그 존재는 타인이라는 거울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사하는 빛이 아닐까. 사방에서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빛, 그 자체가 아닐까. (52)
무엇으로도 꺾어놓을 수 없을 거대한 무력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카탸가 깨어나지 않는 건 신을 향한 그의 간절함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신 앞에서는 부정한 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는 걸,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그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병원에서 맞이하는 계절이 거듭될수록, 절망의 이유가 더 구체적으로 길어질수록 환자의 가족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무력감과 미움은 서글프게도 그들이 깊은 사랑으로 묶여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증거는 증거일 뿐, 증거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무력감과 자신을 향한 미움을 전부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55)
우리 심신에 닥쳐오는 고통은 대부분 불운이지요. 보살핌을 받고 더 나은 상태가 되어야 함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마냥 응석을 부려도 되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몸이 감당할 수 없이 아프면 또 그 모든 걸 잊어버려요. 산다는 건 참 곤란한 노릇이지 뭐예요. (60)
고통은 고통일 뿐이에요. 산화가 아니지요. 고통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고 하찮아지고,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기 일쑤지요. 고통이란 녀석은 사소하게 취급해서도 안 되고 너무 떠받을어서도 안 돼요. 여간 까다로운 녀석이 아니지요. (61)
그해 가을, 나는 스물아홉이었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아무도 모르게 한 번 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리나는 내가 변한 게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때의 내가 전생처럼 느껴지곤 한다. (62)
경험, 그건 양성종양 같은 거예요.
나는 몸을 돌려 반듯하게 누웠다. 햇빛이 사선을 그으며 병실 벽으로 비쳐들었다. 가느다란 빛은 병실을 둘로 나누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양성종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암은 아니에요. 천천히 자라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 않지요. 생명에 위협을 초래하지도 않고요. 딱히 쓸모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몸의 일부죠. 계기가 없다면 그런 게 몸속에 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뱉고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간호사 한 사람이 문을 열고 그를 불렀다. 그는 곧 가겠다고 대답하고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 경험이 당신을 죽음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할 거라는 얘기예요. 나지라. 앞으로 쓸모가 있지도 않을 거고요. 내 경우엔 그랬어요. 지금 당신을 제대로 위로하지도 못하는 걸 보면 알 만하지 않아요? (69)
이 집에서 그를 추억할 것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도록 붙박이장과 서랍까지 샅샅이 헤집었다. 옷장 안 쪽에 붙어 있는 작은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곤란한 얼굴, 치울 수도 내다버릴 수도 없는 살아 숨쉬는 추억. 돌이킬 수 없는 칠 년을 겪어버린 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제야 뒤늦게 울음이 터졌다. (71)
자기들 일이 아니니까요. 자기 일이 아니면 사람은 뻔뻔하게 구는 걸 주저하지 않아요. 쿠르만, 잘 알잖아요. 당신도 예외가 될 수 없어요. (83)
말하자면 그 시절은 일종의 질식이었다. 그의 곁에서 나는 늘 허덕였다. 숨이 가빴다. 그라는 과호흡. 내가 그를 부르면 부를수록 그는 나로부터 빠져나갔고 그런 상태는 나 자신을 위협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그런 질식과도 같은 상태를 열정이라 바꿔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96)
창백함, 청춘의 빛.
사람들은 흔히 청춘이 뜨겁고 활기차고 화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청춘을 지나온 이들이 옛 시절을 추억하며 떠올리는 인상일 뿐이다. 세월은 얼마나 위대한가. 살갗에 자잘한 주름을 긋고 관절을 닳게 하고 피를 탁하게 만드는 세월은, 시들어 가는 육체에 보상이라도 하듯 지난 시절의 기억을 화사하게 물들인다. 넘치는 에너지를 바깥으로 분출하면서도 시시때때로 텅 빈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그 막막한 시절을,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 놓은 수많은 회색 영역과 가능성의 그림자를 쫓아가는 그 불안한 시기를, 그 창백함을 화사한 빛으로 덧칠해버린다. 세월이 붓질해 놓은 기억 속 청춘은 더없이 아름답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추억을 걷어내고 지금 청춘을 살고 있는 이들을 본다면 단연코 청춘은 창백한 빛이다. 무언가를 시작하면, 그것이 생산적이든 비생산적이든 무턱대고 치열해지고 마는, 때로는 자신에게, 나아가 타인에게 지나치게 옹졸하게 굴고, 상처를 받으면서 동시에 주고 마는 청춘. (101)
나는 쿠르만 곁에 않았다. 어떤 말이든 입 밖으로 뱉는 순간 무용해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두 사람의 시공간이, 아니, 쿠르만과 나, 나와 카탸, 카탸와 쿠르만 사이의 시공간이 점점 한없이 아득해지는 것을 감각했다. 우리 각자가 끝끝내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다면, 온전히 타자에게 귀속되어 자신을 버릴 수 없다면, 내가 타자가 되는 일이 결단코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갇힌' 존재가 아닐까. 어쩌면 우리 각자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 견디는 방식은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열어 보이는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에 갇히는 것, 갇힌 채로 타자의 곁에서 기꺼이 또 한번, 함께, 이중으로 갇히는 것이 아닐까. (125)
일상의 톱니바퀴가 모처럼 시간을 상처내지 않고 부드럽게 굴러갔다. (143)
그들의 위로가 형식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도, 그들의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 결과적으로는 쿠르만을 뼈아프게 만들어버렸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들 때문만은 분명 아니었지만, 어찌 보면 그 모든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다른 방향과 속도로 흐르게 된 각자의 시간이 그들 사이를 벌려놓았을 뿐이었다. 그 시차를 그들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161)
내일이나 미래에 관해서는 쓰지 않는다. 예상한다는 것은 과거를 더듬는 일의 연장이다. 돌이켜볼 수 없다면 내다볼 수도 없다. 이제는 돌이켜보는 일만으로도 버거울 때가 많다. 일 년 전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해서 일 년 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얼마 후면 나에게 예전의 일들이란 그림 액자를 떼어낸 빈 벽의 때 타지 않은 부분처럼 남을 것이고 앞으로의 일들이란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서 의자를 찾는 일이 될 것이다. 집에 있는 거울을 전부 치워버리고 싶은 날도 있고 거울을 찾아 헤매는 날도 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날도 있고 아무것도 물을 수 없는 날도 있다. 좋은 날도 있고 안 좋은 날도 있다. 순간과 순간들만이 내 곁에, 나에게 남아있다. (188)
사실 올가든 다른 누구든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나를 설득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192)
아주머니는 내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를 듣고 웃음 짓고는 너도 언젠가는 몸속에 따뜻한 물을 품게 될 지도 몰라, 하고 말했다. 너도 한때는 네 엄마의 뱃속, 그 따뜻한 물속에 웅크린 채 태어나기를 기다렸었지, 그런데 우습게도 우리 모두는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떠나게 되는지도 알지 못하지, 언젠가 내가 너를, 아니면 네가 나를 떠나게 될지도모른다, 라고 우리 인간은 떠나기 위해 살고 있는 거라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은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주며 훌쩍이는 나를 달랬다. 어렸던 나는 그날 내가 가진 따뜻한 물을 전부 눈으로 쏟아내버렸다고 믿었었다.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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