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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기쁨 :: 프랭크 브루니
꼬마대장님
2023. 6. 22.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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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나는 삶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다고 믿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아직 마치지 못한 일들, 아직 실현하지 못한 꿈들, 그밖에 다른 실망스러운 일들은 근명성과 상상력의 실패이기에 맹렬히 노력만 한다면 결국에는 모두 만회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야 나는 그 믿음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11)
복잡하고 흔치 않은 병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것이다. 내게는 절실한 대답이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급해지지 않는다. 나의 곤경은 내게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나의 구원자들에게는 잠시 미뤄둘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똑같이 다급한 사례들과 똑같이 간절한 탄원자들을 상대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하고 있었으니까. 이것은 그들의 냉담함에 대한 완벽한 변명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의 설명은 된다. (20)
킨슬리는 이따금 자신이 "내 세대가 파견한 정찰병이 된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건강한 내 또래라면 60~80대는 되어야 경험하게 될 것을 나는 50대에 미리 경험해보기 위해 파견된 것 같았다. 파킨슨병보다 훨씬 나쁜 병도 있고, 나보다 훨씬 심각한 형태의 파킨슨병을 겪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경험한 이 수준의 이 질병은 앞선 미래의 흥미로운 맛보기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것은 노년에 대한 비기너 가이드다." (39)
그리고 가능성의 한계가 줄어드는 것을 목격했다. 아니, 수정하겠다. 나는 가능성의 한계가 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더 친절하고 다정한 언어로 해석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고 있었다. 이것은 단지 타당한 해석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해석이자 행복을 지키는 해석이기도 했다. (40)
클리셰는 진실의 아주 가까운 친척이고, 통찰의 보급형 유사품이다. 삶이 시다 못해 쓰디쓴 레몬을 내민대도 당신은 그것으로 레몬에이드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얻은 큰 배움이었다. 언제나 이웃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는 것도, 구름의 저편은 늘 은빛으로 빛난다는 것도, 밤은 새벽이 오기 전에 가장 어둡다는 것도 비로소 깨달았다. (40)
혹시 시신경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뇌졸중을 겪은 후 이 사진들의 감정가를 루브르 박물관의 값어치보다도 높게 산정했다. 시신경이 얼마나 연약해 보였는지, 여남은 개의 얇은 혈관들로부터 양분을 얻는 이 가느다란 실이 어떻게 안구의 뒤쪽을 뇌에 연결해 내가 태양이 뜨고 지고 수플레가 부푸는 것을 볼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지 궁금해한 순간을 나는 도무지 잊을 수 없다. (47)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 자체로 고통과 노화의 우화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운명을 예측할 수 없고 우리의 세계가 한 순간에 뒤바뀔 수 있음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웅대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환기했다. 우린 예전보다 좁아진 행동반경 안에서 즉흥적인 방식으로 의무를 다하고 즐거움을 붙들어야 했다. 선택지는 전보다 줄었고 두려움이 항상 우리를 갉아먹었다. 심지어 내가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일이 하찮게 느껴졌다. (54)
그해 봄과 여름, 나는 거의 매일 그리움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어떤 스파크나 화학 작용으로 내 곁을 지나갈 때마다 나를 조금씩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던 사무실 동료들의 미소가 그리웠다. 이웃과 내가 언제나 인사와 함께 나누었던 포옹, 이제는 위험한 행위가 되어버린 다정하고 자상한 몸짓들이 그리웠다. 바쁜 시간대의 지하철이 그리웠고, 피트니스 클럽에서 별 내용은 없지만 생기 넘치는 음악을 들으며 헉헉대던 시간이 그리웠다. 물론 이런 것이 그리워질 수 있으리라고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56)
교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삶이란 상실에 적응하는 일입니다." 나는 교수가 한 말이 이것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상실을 다루는 일"이었을 수도 있고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뭐라고 표현하든 그 안에 담긴 생각은 동일했다. (59)
삶의 도전은 상실에 적응하는 것, 더 구체적으로는 판단력과 품위를 키워서 상실은 불가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삶의 유일한 궤적임을 아는 것이다. 삶의 도전을 마주하고 가늠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있고 그중에는 위안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잘 살기 위한 비결, 가끔은 살아남기 위한 비결인 셈이었다. (60)
유머.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서 빠져나오려면 공포를 실소로 바꾸는 풍자와 독설이 필요하다. (중략) 그것은 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서 송곳니를 제거하는 것과 같았다. 비명을 지른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흐느껴 울어도 마찬가지다. (68)
오토바이 수업 중에 지금까지 기억하는 건 딱 하나밖에 없는데, 그건 '뭐든 쳐다만 봐도 나는 이미 그리로 향하고 있다'는 거였어. 나는 그걸 삶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였어. 구멍과 같은 나쁜 일을 곱씹으면 그 구멍에 빠지게 돼. 내가 이걸 어떻게 알까? 말은 이래도 이미 그 구멍을 여러 번 들여다봤어." 그때마다 도리는 깨달았다. "들어가는 건 너무 쉬워. 다시 빠져나오기가 어렵지." (70)
의사들도 틀릴 수 있다. 의사도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의사가 신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한 확실성, 그러한 구원을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명확한 역할을 원한다. 의사는 지시하고 환자는 따른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따금 불완전하고 오만하고 서두르기 때문에 때로는 억측하고 때로는 착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사를 만나더라도 의사와의 관계를 하나의 파트너십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88)
정신이 손상되지 않고 에너지가 견뎌준다면 나의 최고 관리자는 나 자신이다. 내가 느끼는 기분이나 감정의 조절 스위치는 내가 쥐고 있다. 나 홀로 그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나 홀로 이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나 홀로 그 결과와 함께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구조하려고 실질적으로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손님이지 주인이 아니다. 그들은 이 집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 (89)
내게 일어난 일을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잊어버리는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일어난 일에 합리적으로 잘 대처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내가 그렇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기울인 노력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92)
세상에는 내가 마주친 것보다 한없이 더 잔인한 운명의 반전들이 있었다. (100)
"짓궂네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쨌든 다섯 살짜리 꼬마의 이야기였다.
"아니요." 후안 호세가 내 말을 바로잡았다. "아름답죠."
"어째서 아름답죠?" 내가 물었다.
"내가 성공했다는 뜻이니까요."
"아이가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요? 그걸로 장난을 칠 만큼?"
"네. 정확히 그겁니다." 후안 호세는 빙극 웃었다. (119)
후안은 시력이 좋은 사람들은 낯선 이들의 얼굴이 가져다주는 기분 전환이나 위안, 동행의 느낌을 과소평가한다고 말한다. "시선을 마주칩니다. 표정을 읽고요. 당신을 지나치는 사람과 대체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서로 연결되지요." 후안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외로운 세계입니다." (120)
나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간극을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얼마나 예리하게 알아차리는지, 얼마나 꾸준히 기억하는지는 모르겠다. 뇌졸중을 겪고 안개 같은 시야를 경험하며 한동안 내면의 날씨를 감당할 방법을 모색하다 이 근본적 진실을 새로이 음미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앞으로 매끄럽게 나아가는데 나만 삐걱거리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감당하고 있다는, 남들은 토끼풀에 안착했는데 나만 가시덤불에 들어섰다는 믿음. 자기 연민은 대개 이러한 망상에서 나온다.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실은 모든 사람이 언제라도 강렬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고통을 헤쳐나가기 위해 과거에도 노력했고 현재에도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째서 나일까?" 물론, 더 나은 질문이 있다. "어째서 나라고 아니겠는가?" 분투가 평안보다 더 보편적인 조건이라면, 분투가 만족보다, 평화보다, 어쩌면 사랑보다 더 보편적인 조건이라면 분투를 피해갈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것을 분투라고 불러야 할가? 분투로 여겨야 할까? 분투라는 말은 보통 수준을 넘어서는 노력, 기준에서 벗어남을 함축한다. (153)
내가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퍽 좁은 범위의 사람들만 따져보아도, 특별한 관심이 필요한 노쇠한 부모, 치료비가 많이 드는 병약한 자녀, 영혼을 망가뜨리는 결혼 생활, 달콤한 꿈을 산산이 깨뜨리는 불임, 자존감을 파쇄하는 직장, 만성 우울증, 만성 통증, 약물 남용 등등의 균열, 가시덤불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 중에 즉각적으로 눈에 띄거나 겉으로 두드러지는 괴로움은 거의 없다. 일부는 자존심 때문에, 또는 나약함을 밖으로 드러내거나 고민을 광고해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약속 때문에 적극적으로 부지런히 은폐되었다. (157)
하지만 이때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미식축구의 만성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수수께끼였다. 럭에게 재능은 고문이 되었고, 복잡하게 얽힌 이 둘을 떼어놓을 방법은 없었다. 럭이 운동선수로서 누리는 영예는 럭을 선망하는 팬들은 알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했다. 가장 중요한 쿼터백인 앤드류 럭처럼 되고 싶은 남자들은 일개 군단을 이루었다. 하지만 정작 럭은 그 군단에 없었다. (161)
삶에서 어려움이 계속될 테지만 대니는 어려움에 대처하는 전략들을 갖고 있다. 대니는 그 중 한 가지를 내게 공유했다.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힘들 때 저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들을 넘겨볼 겁니다." 사진 속에서 대니는 졸업식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하와이를 여행하며 마법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니가 몹시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한 더 어린 시절의 그가 있다. 대니는 그 사진들을 찬찬히 보며 스스로에게 "우는 소리 그만해"라고 말한다. (171)
스티븐슨은 이렇게 덧붙였다. "진실은, 우리는 모두 세상이 흔히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179)
매리언은 수개월간 이러한 감정들과 싸운 끝에 이것이 자신을 한자리에 붙박아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 매리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매리언의 선택은 분명했다. 매리언은 어둠에 굴복할 수도 있었고, 춤을 출 수도 있었다. 매리언은 춤을 추기로 선택했다. (중략) 하지만 매리언이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사실 기쁨이었다. 매리언은 삶이 우리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싶게 만들더라도 그러지 말라고,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도피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매리언은 그것들을 다 짧게 해보았지만 전부 시간 낭비였다. (184)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에 다시 나가는 도전과 모험보다 이 깨달음이 더 무서웠다. 매리언은 그때를 회상했다. "나는 '오, 안 돼'하고 말했어요. 앞으로 내 인생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고? 오, 안 돼."
'우리는 살아 있는 한 계속 움직여야 해요.' 매리언은 움직였다. 매리언은 크게 움직였다. (188)
다음번에 누구한테 직업의식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들으면 노아의 방주는 딜레당트가 지었고 타이타닉호는 전문가들이 지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라고 했다. 야망에 쫓기는 일벌레가 되지 말 것이며 긴장을 풀고 한숨 돌릴 시간을 넉넉히 남겨두라는 것이었다. (199)
현재 과학자들이 뇌에서 발견하는 것은 탄력성이다. 신경 가소성은 부상이나 질병 이후 회복하거나 적응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무적인 소식이다. 아니, 모든 사람에게 고무적인 소식이다. 우리가 겪는 노화가, 적어도 우리의 정신과 관련해서는 단순히 쇠퇴의 과정만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노화는 변형의 과정이다. (211)
만일 원기 왕성한 활동으로 채워진 생활을 유지한다면,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가꾼다면, 스스로를 지적으로 단련한다면, 식단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규칙적이고 활기차게 운동한다면, 목적의식을 갖고 산다면 이 모든 것은 건강한 인지 능력과 정신적 민첩성을 높여줄 가능성이 크다. 여섯 가지 권장 사항이 흥미롭다.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조언을 빼다 박은 것 같다. 자, 충만한 삶은 뇌에 좋은 삶이고 뇌에 좋은 삶은 충만한 삶이다. 여기에는 반박할 수 없는 우아한 논리가 담겨 있다. (215)
나는 5개 정도 해당하는 것 같은데, 매일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5개를 균형적으로 고루 갖춘 날에는 정말 단순하게 삶을 보내고 충만하게 지낸 것 같다. 그러네 정말, 우아한 논리가 담겨 있네.
리건은 내 안에 너그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였다. 그리고 새로 샘솟은 너그러움은 나 자신이 쇠약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상쇄해주었다. (254)
이 관계를 완전히 잘못 판단한 탓이엇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개들이 가져다주는 보장된 기쁨이 아니었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헌신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나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다루는 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뇌 영상 촬영 따위를 고려하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예산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사랑해"라는 말을 들을 때보다 말할 때 훨씬 더 많은 세로토닌이나 도파민이나 엔도르핀이 분출된다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분출된다고 확신한다. 그 어떤 말도 사람을 이보다 더 활기 있게 만들 수 없으며 그 어떤 선언도 사람을 이보다 더 고귀하게 만들 수 없다. (269)
나는 수년째 엘라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어째서? 이 삶에는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이 있고 너무나 많은 보물이 쌓여 있어서 커다란 한 도막이 통째로 가려지고 묻히고 잊혀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것을 재차 상기시켜야 했다.
아버지와 내가 그때 누린 것과 같은 순간들은 활짝 피어나는 순간 꽉 붙잡아야 했다. 그날의 드라이브가 빛났던 이유는 단순히 내가 행복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행복을 알아 보고, 적절한 이름을 붙여주고, 거기에 오래 머무르고, 기념품처럼 간직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필요할 때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새롭게 떠올릴 수 있도록 잘 간직했기 때문이었다. (295)
우리의 신체적 근육이 약해지면 우리의 정서적 근육은 강해지고, 우리는 갈수록 비극에서 희극을, 후퇴에서 전진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보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우리는 관점에 대해 위대한 장인이 된다. (313)
그것은 내가 앞서 소개한 '광고판'을 상상할 때 연습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 조건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는 기술, 그 크기를 다른 관점에서 재어보는 기술, 더 보기 좋은 액자를 씌움으로써 그림은 그리 암울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기술이었다. 새로운 액자를 씌운 그림은 이따금 더 흥미롭다. (중략)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모두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이고, 대체로 삶의 후반기에 더 중요한 도구다. 이 도구는 위험할 정도로 예리하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슈퍼마켓에 입장하는 취약한 시니어들의 행렬을 로크포르 치즈가 등장하는 로코물로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 (313)
바전은 자신이 지금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은 흠 많은 건강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나이 덕분이라고도 생각한다. 이 정도면 만족한다, 이 정도도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정서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서 들은 말과 일치한다. 그들은 본질적이지 않은 것, 사소한 것을 옆으로 밀어내는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317)
한 가지가 닫히면 다른 것을 이용할 수 있고, 심지어 이견의 여지가 없는 희생조차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일종의 방향 전환일 수 있다. 이따금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내가 앞 챕터에서 언급했듯이 한계나 상실은 우리가 모색하지 않았을 실험, 우리가 습득하지 않았을 능력, 우리가 얻지 못했을 통찰로 가는 관문이 된다. 우리는 그저 그러한 전망을 허용하고 그러한 관점을 우아하게 내 것으로 취해야 한다. (318)
그러나 우리의 첫 번째 자아가 손상되거나 죽었을 때 우리에게는 우리를 구해줄 두 번째 자아가 있다는 것, 아마도 세 번째, 네 번째 자아도 있다는 발상 또는 현실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 (320)
완전한 자유는 그 자신의 폭군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덜 자유로움으로써 더 방향성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도 공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명백한 불공정이었다.(322)
쉰 살을 훌쩍 넘긴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나빠지고 있는지, 우리는 그나마 나은 시절을 살다가 떠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를 말하고 싶어 한다. (323)
이러든 저러든 나는 이긴다. 나 자신에게 승리를 허용했기 때문에 나는 이긴다. 또는 나 자신이 승리하도록 의지를 발휘했기 때문에. 여하튼 그것은 승리다. (324)
마지가 배운 것은 그런 걱정은 흘려보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마지는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냥 물러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지." 마지는 말했다. 마지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332)
병약해지거나 늙는 것은 상실을 의미한다. 절대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이상적으로는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을 잠식하는 예민한 자의식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변화의 기폭제가 아니라 잔인함이 되곤 하는 요란한 기대들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분노를 흘려보내는 것이다. 분노는 자신을 되찾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많이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가 많은 것을 흘려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33)
"예전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마음이 부서졌다고 말하는 것은 마음이 부서져 열렸다는 것과 아주 가까운 말이라고요." 하비브는 회상했다. 그리고 하비브의 부서져 열린 마음은 생각의 최전방에 이러한 질문들을 가져왔다. "나는 진정한 기쁨을 경험하고 있는가? 이것은 내가 걷고 싶었던 여정인가?" (중략) 하비브의 입술과 두뇌에 머무는 수많은 문구를 시작하는 단어는 '나의'가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가로대가 사라졌다. 위로 오른다는 것은 더 큰 영광이 아닌 더 큰 너그러움을 향한 것이었다. (354)
전투력은 마치 주름처럼 비바람에 오래 노출되는 과정에서 축적된다는 것을 펠로시는 확실히 보여주었다. 펠로시도 바이든처럼 수차례 사랑해보고, 수차례 상실해보고, 수차례 재정비해보고, 어떻게 해야 단호히 밀고 나갈 수 있는지 수차례 모색해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도덕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367)
브로디가 말하는 진실은 "나이 듦은 여러 면에서 우리를 어느 때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브로디는 자신이 "이제 자연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우리의 삶도 돌고 돈다는 것을 알 정도로 충분히 나이가 들었다"고 설명했다. 브로디는 예전과 달리 한 주나 하루가 좋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허탈해하지 않았다. 충분한 경험을 한 덕분에 "내일은 더 나은 하루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브로디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이가 들수록 현재의 내 모습에 만족하게 된다. 나는 전보다 더 얇아진 동시에 더 두꺼워졌다. 이제 나는 이 모든 한계를 안고 있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젊었을 때 우리를 괴롭힌 무수한 불확실성(정체성, 공동체에서의 역할, 삶의 철학)은 대체로 증발했다. 이제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확실하게 안다." (중략) 내가 지닌 동정심과 평정심을 놓치지 않으면 지혜가 길모퉁이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370)
슈워츠는 벨에게 말했다. "무슨 병에 걸렸든 하루 24시간 내내 환자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는 여전히 빛나고 당신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여전히 음식 맛도 좋지요. 이 모든 것을 전과 다름없이 누릴 수 있습니다." (373)
중요한 것은 찬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옳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파우치의 허영심은 썰물처럼 서서히 빠져나갔다. 아니면 적어도 더 건설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나이가 들수록 이 모든 것은 나에 관한 일이 아니게 됩니다." 파우치는 말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분투하는 것은 갈수록 덜 중요해지고 내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고 거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방되는 것보다 더 원대하고 좋은 일이었다. 그것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376)
나는 위버에게 줌으로 인터뷰를 처음부터 다시 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괜찮습니다." 위버는 말했다. 짜증이나 까칠한 기색은 없었다. 소란을 피우는 것은 종종 불편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키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부드러운 대처였다. (380)
마치 낸시의 손상된 이동성이 우매함과 같은 것인 양. (중략) 낸시는 그러한 무례함에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낸시의 분노보다 훨씬 돋보인 것은 낸시의 결심이었다. 낸시는 자신을 무시하거나 자신에게 거들먹거리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 설득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낸시는 그들이 자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든 상관없이 원하는 곳에 가고,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기쁨을 주는 취미를 즐기겠다고 결심했다. (384)
이 관계의 모호함 속에서는 신호가 불분명하고 몸짓은 모순적이며 시간은 아마도 허비된다.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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