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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겨울 2022 :: 김채원, 성혜령, 현호정

꼬마대장님 2023. 1. 2.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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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가운데 걷기 :: 김채원

그게 좋은지. 행복한지. 부지런히 정신병원을 전전하면서 복용량을 늘리고 이런 감정적인 일들을 만드는 것이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너의 무엇을 내가 도울 수 있는지. 그런 게 아니야, 아빠. 그냥 내가 구걸을 하는 거지, 나한테. 이건 어때. 이건 좀 괜찮아? 아니구나... 그럼 이건 어때, 마음에 들어? 이러면 조금 더 살고 싶어?
노인은 웃었다.
그럼 지금은 어때. 네 마음에 들어? (22)

 

노인은 어쩐지 지칠 대로 지쳐 무언가를 털어놓고 싶었는데 막상 털어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남아 있는 기분 같은 것만 모래알처럼 쌓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발도 우산도 세탁물도 화분도 모두 그대로 내버려두고 침대에 금방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나는 늙고 병들었어. 그것이 아니라면 정반대의 방식으로 여러 대의 티비를 켜두고 볼륨을 최대치로 키운 뒤에 그 가운데 한순간의 잠도 없이 혼자 앉아 있고만 싶었다. 모든 소리를 한꺼번에 듣게 되어 귀를 얻어맞은 듯이 어떤 사람들은 내 머리가 좀 이상해졌다고 할 거야 숨 쉬는 것보다도 앞서 내부의 소리를 덮어버리고 외부의 소리만을 듣게 되는 것이다. (29)

 

소설을 일고 쓸 수 있기 때문에 소설을 읽고 쓰겠다는 다짐은 평소에도 항상 하는 다짐이자 마음가짐인데요, 이를테면 저의 '할 수 있음'에 대해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일종의 자기 암시 같은 것입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한다. 이 말에 ' 할 수 없음'이 끼어들 자리는 감히 별로 없거든요. 그러니까 할 거야, 다짐하면서 혼자 잘 놀다가 매일 책상 앞에 앉습니다. (37)

 

제가 소설 속 인물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혹은 내내 걷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이해해보고자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에는 일정하지 않은 여러 시간의 간극이 필요하고, 풍경도 필요해요. 시간이든 풍경이든 인물들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전부 주자, 생각하며 매번 쓰고 있는데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38)

 

 


버섯 농장 :: 성혜령

훼손에 대한 이야기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보면 좋겠습니다. 기진의 부모의 사고사에서 언급되듯, 자신이 초래한 것이 아닌 죽음에마저도 신체의 일부를 훼손당하는 방식으로 '삶'이 수습됩니다. 누군가의 삶에 대한 비의지가 필연적으로 타인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면 역으로 부러 타인을 해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수습하는 알리바이로 삼고자 하는 것이, 진화가 남자의 사체에 손을 댄 까닭이 아닐까 추측해보았습니다. 이미 맞닥뜨린 불행에 사후적으로 인과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할까요. 말하자면 선후 관계가 뒤집힌 인과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해서 이들의 미래가 궁금해졌습니다. 남자는 죽었지만 앞으로 진화와 기진의 삶은 계속될 테니까요. 의지적 훼손을 앞으로 이들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게 될까요? (90)

 

 


연필 샌드위치 :: 현호정

꿈속의 명령은 말이나 글로 전달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그저 알며 느낀다. '먹어야 한다.' 직관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상처의 피를 참는 것이 불가능하듯 불가능할 따름. (98)

 

영적인 탯줄은 언제 끊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딸이 엄마가 되는 그 순간일까? 그 순간에 엄마는 자신과 자기 엄마를 이어주던 그 탯줄을 끊고 나와의 결속을 선택한 걸까? 사람의 배꼽이 하나인 이유는 그 때문일까? (110)

 

우리의 육체성은 언제나 미추에 걸친 독특한 양가성을 지닐 테고, 아마도 이 점이 우리의 삶을 더욱 복잡하고 모순적으로 만들겠지요.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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