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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공부 :: 최재천, 안희경
꼬마대장님
2022. 8. 2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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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부모 세대는 학생 인권이란 게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때로 선생님에게 불손하게 굴며 마치 인권을 되찾은 줄 착각하며 삽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인권 회복은 학생으로 사는 기간도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비로소 실현됩니다. (9)
저는 무엇보다 앎이 가져오는 사랑이 소중하다고 여겨요. 우리 인간은 사실을 많이 알면 알수록 결국엔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39)
제가 하버드대학교에서 생태학을 가르쳤어요. 수업 중에 수학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있었죠. 어느 날, 2차 방정식 수준을 설명하는데 한숨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희 2차 방정식도 모르니?"라고 놀리듯 물었죠. 배운 적이 없다고 답하더군요. 그래도 가르쳐야 할 부분이 있어 미적분을 알아야 풀 수 있는 숙제를 냈습니다. 대신 숙제 마감 기한을 넉넉하게 2주 주었죠.
수강생 80명 모두가 숙제를 제출했어요. 2차 방정식도 모르던 학생들이었습니다. 한 학생에게 어떻게 풀었는지 물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미적분학 책을 읽으면서 풀었다고 하더군요. 제가 꿀밤을 주는 시늉까지 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죠. 미적분을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풀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그걸 왜 못 하느냐고 되려 반문하더라고요. 그런 학생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 시절, 문과 학생들에게 하버드대학교에서 냈던 문제를 그대로 내고, 3주 줄 테니 도서관에서 미적분학 책을 펴놓고라도 풀어보라고 했습니다. 한 명도 못 풀었어요. 미적분학 책을 읽을 능력이 안 되는 거예요. 미국 학생들은 한 시간을 주고 풀라고 하면 못 풀지만, 2~3주를 주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풀라고 하면 대부분 푼다는 거죠. 그 정도까지는 중, 고등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 안에 경쟁하는 문제 풀이 훈련만 시키고, 실제로 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좌우하는 능력을 키워 주진 않는 것 같습니다. (63)
학문을 성취하는 공부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공부가 이루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위대한 학자들이 벽돌을 착착 쌓아가듯 빈틈없이 공부하셨을까요? 저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학문하면 생애에 못 끝냅니다. 지나친 완벽주의자들은 어느 단계까진 도달하지만 더 나아가진 못하더라고요.
제가 대가들과 조금 깊이 이야기를 나눠본 경험이 있는데, 대가인데 이런 것도 모르나 싶을 만큼 그분들에게도 구멍이 있어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있다고 봅니다. 대가는 능력이 출중해서 하나씩 모두 쌓아가며 지금의 자리로 올라갔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분들도 꼭 완벽하지는 않다는 게 제 나름의 확신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공부의 구성 요소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젊은 친구들,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어차피 조금은 엉성한 구조로 가는 게 낫다. 이런 것에 덤벼들고 저런 것에 덤벼들면, 이쪽은 엉성해도 저쪽에서 깊이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쪽과 저쪽이 얼추 만나더라.' 깊숙이 파고든 저쪽이 버팀목이 되어 제법 힘이 생깁니다. (83)
저녁 식사 후 설거지와 뒷정리는 언제나 제가 합니다. 다 하고 책상에 앉으면 어김없이 오후 9시였습니다. 어느덧 이제는 저녁에 집 밖으로 나가도 되지만 나가지 않습니다. 제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요. (95)
'자발적 홀로 있음'이라는 표현이 참 좋네요. 시인 황동규 선생님은 그걸 '홀로움'이라 부르셨죠. 저는 어울리기 좋아하지만 반드시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합니다. 그 시간에 외롭다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홀로움, 참 멋진 단어인 것 같아요. (97)
지금까지 엄청난 작업량을 소화한 특별한 시간 관리법이 있으신가요?
많은 사람이 마감 시간 1초 전까지 하죠. 저도 그런 사람이었어요. 어느 순간 그 비극의 악순환을 끊었습니다. 제가 사회적으로 조금 성장했다면, 그 비결은 시간 관리입니다.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기숙사 사감을 할 때 제가 데리고 있는 한 학생에게 배웠어요. 제 지도 학생 기숙사에서 맥주를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룸메이트들 가운데 한 명이 늦게 들어왔어요. 다들 한 잔하자고 권하는데, 그 학생은 할 일 있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라고요. 서양인은 친구가 할 일이 있어서 간다고 하면 놔두지만, 저는 한국인이니까 그 학생을 쫓아가서 말했죠. "친구들이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렇게 매정하게 들어가니?" 그러니까 이해 못 하겠단 표정을 지었어요. "할 일이 뭔데?"라고 물었더니 리포트를 써야 한대요. "언제까지 내야 하는데?"라고 물었습니다. 5일 후까지래요. 속으로 말했죠. '뭐 이런 매정한 녀석이 있나? 괘씸하네...'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려는데 "선생님, 저 바빠요"라고 하는 거예요. 내일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죠. 사감의 임무 첫 번째가 아이들과 식사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잘 지내고 있는지 자연스레 살피는 겁니다. 기숙사 식당에 둘이 앉았는데, 어젯밤 일이 잊히지 않아서 또 물어봤습니다. 5일 후에 제출할 리포트를 기어코 그 시간에 해야 했느냐고요. 너무도 당당하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답하더군요.
그날 이후 제가 발견한 하버드대학교 학생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학생이 그렇게 해요. MIT 학생들과 하버드대학교 학생들이 다른 면이 있습니다. MIT 학생들은 진짜 열심히 공부합니다. MIT는 모든 건물이 지하 터널로 연결돼 있어서, 일단 한 건물로 들어가면 햇빛을 안 봐도 됩니다. 온종일 지하 터널로 다니면서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며 실제로 햇빛을 자주 안 봐요. (중략) 저는 그 학생에게 모든 걸 미리 하는 태도를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미리 한다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5일 후에 내야 할 리포트는 오늘 끝낸다는 의미였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5일이라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미리 끝내고 틈날 때마다 리포트를 다시 들여다보며 조금씩 고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질이 좋아질 뿐 아니라 돌발 변수가 생겨도 대처할 시간이 있다고요.
그날부터 저는 '미리 한다'가 습관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1주일을 앞서 끝내고자 결심했는데, 처음엔 잘 안 되더라고요. '실제로 1주일이 있다'라는 생각이 제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연습하니까 자동 입력이 됐어요. '언제까지 끝내야 하는 일'은 '1주일이나 2주일 전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 됐어요. 미리 다 해놓습니다. 남은 기간 저는 다른 일을 하다가 갑자기 30분 정도 여유가 생기면 그때 다시 그 일을 살펴봅니다. 한 번 더 읽어 보고, 조금 고치고, 파일을 저장하죠. (중략) 그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생산성을 갖게 됐죠. 저에게는 최적의 비법이에요. 십몇 년 전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때 독감을 지독하게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있었어요. 당연히 일이 밀렸죠. 막상 털고 일어났는데 내일까지 마감해야 하는 일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뛰면서 도저히 끝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불안했어요. 너무도 오랜만에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벼랑으로 모는 습관을,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착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바삐 산다는 걸 다들 아세요. 어디 가면 저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제가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무슨 일에도 관여한다고 신문에 실리니까요. 저에게 다들 묻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일을 하면서 어떻게 느긋할 수 있느냐고요. 제 대답은 하나죠. 마감 1주일 전에 미리 끝냅니다. 마음에 엄청난 평안을 줘요. 결과물의 질을 높일 수도 있고요. (104)
글을 잘 쓰는 두 가지 방법은 '일단 미리 쓴다. 계속 검토하면서 물 흐르듯이 넘어갈 때까지 손본다'네요. (114)
세상을 이해하는 사고 체계가 자리잡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세상을 나와 분리된 세계로 보니 TV에서 방영하는 다쿠멘터리를 보듯 감동을 받고 비판을 하면서도 관람자 위치에서 흘려보내는 건 아닐까 싶어요. 책을 읽긴 읽었지만, 깊게 사고하며 안으로 다지는 접근을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짚어줘야 할 텐데요. 책 읽기가 갖는 힘이 뭘까요? 20, 30대에게 길 안내를 해주신다면요? (143)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유를 묻지 말고 무조건 도와주는 겁니다. 제가 보기엔 그게 답이에요. 사실, 제가 위험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는 '아이들은 안다'라는 확실한 느낌이 있어요. 기성세대는 감지하지 못하는 신호를 아이들은 감지하고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면서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그 모니터 앞에서 이미 느끼며 살고 있어요. (185)
생태사상가인 사티쉬 쿠마르를 인터뷰할 때 큰 힘을 얻은 말이 있는데요. 제 말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다재다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특질은 다재다능함에 있다.' 그는 강조했어요. 우리는 모두 르네상스 인간이라고. 뭐든지 잘할 수 있으니 굳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 하기보다 정원사이자 미술가이자 생물 교사도 될 수 있다고. 그러니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고 마음껏 하라고요. (191)
인간만은 유일하게 자기가 직접 해보지 않은 일을 글과 말을 통해 배워서 하잖아요. (230)
엄마 침팬지는 새끼 침팬지를 가르치지 않아요. 가르침은 없습니다. 배움만 있어요. 새끼 침팬지는 옆에서 그냥 보고 배워요. (중략) 동물 세계에는 선생님이 없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냥 거기 있고 아이들이 보고 배웁니다. 저는 우리가 약간 동물스러운 교육을 하면 좋겠어요. 선생님은 먼저 가르치려고 덤벼 들지 말고, 아이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일종의 촉진자가 되어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엄마 침팬지가 새끼가 실패하는 것을 모르지 않아요. 관찰해보면 계속된 실패를 보는 엄마 침팬지의 표정이 착잡합니다. 마치 '붙들고 가르쳐봐?' 이런 고뇌를 하는 듯해요. 사실은 아니겠죠. 관찰하는 저의 감정이 이입됐을 텐데요. 엄마 침팬지는 실패하는 새끼 옆에서 자기 열매만 계속 깨먹고 있습니다. 가끔은 새끼가 엄마 침팬지 걸 뺏어 먹어요. 뺏기면 할 수 없지만 '배고프지? 엄마가 까줄게' 그러지는 않습니다. 새끼는 배고프니까 어떻게든 기술을 익혀서 먹으려고 엄마 침팬지를 더 세심하게 관찰하겠죠. 마침내 자기가 혼자서 탁! 깨 먹는 순간이 오는 거예요.
우리는 아이를 너무 가르치려고 덤벼드는 것 아닐까? 침팬지가 배우듯이 몸으로 익히면 긴 인생에 훨씬 더 강력한 학습이 될 텐데, 급하게 욱여넣으려고 애쓰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합니다. (233)
예전에는 아이들끼리 어울려 들판을 거닐고 개울가에 가고 동네를 돌아다녀서,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엄마가 정확히 알 수 없었다고요. 영어로 '로밍roaming'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며,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환경을 제공해주자고 했습니다. (중략) 제가 이 말을 한국 학부모들에게 하며 창의력을 기르고 싶으면 아이들에게 탐험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는데, 반응이 심드렁했습니다. (242)
'메기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북유럽 해역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이 청어인데, 바다에서 잡은 청어는 항구에 도착하는 동안 대다수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따라 들어온 메기가 있던 수족관의 경우 꽤 많은 청어가 항구까지 살아 있었다고 해요. '한 조직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효과'로 '메기 효과'라는 말을 씁니다. (250)
제가 국립생태원장으로 일할 때 가장 명심했던 경영 십계명 중 하나가 '이를 악물고 듣는다'였어요. 조직의 리더가 되면 말이 많아집니다. (중략) 학생과 마주 앉아서 스파게티를 먹잖아요. 조금만 참으면 아이가 말을 합니다. 너무 불편하니까요. "오늘 왜 부르셨어요" "맛있어요. 저도 이거 좋아해요." 슬금슬금 먼저 말을 건네요. 약간 무심한 듯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중략) 1초는 부족합니다. 1분은 참아야죠. 침묵을 내가 깨지 않도록 이 악물로 참아야 해요.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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