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어금니 깨물기 :: 김소연

꼬마대장님 2022. 6. 17. 15:52
반응형
SMALL
균형을 찾기 위해 자주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은 이를 악물고 가장 열심히 산 시간이라는 것을, 여기 모인 글들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인내심이 자애로움으로 변해가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고 할까. 요원한 줄로만 알았던 회복이 내 주변에 도착해 있다는 것도 지금은 알 수 있다. (9)

 

 


엄마를 끝낸 엄마

어차피 엄마에 대한 나의 추억은 주로 엄마를 증오했던 장면들뿐이었다. 증오심이 성장기의 내게는 얼마간 유용했다. 덕분에 내 마음대로 내가 되어갈 수 있었다. 애착에서 출발했던 증오라는 핑계 때문에 죄책감도 그다지 없었다.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위에서만 증오하려 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16)

 

 


입이 있다는 것

숟가락에 그득 담긴 찰랑찰랑한 액체를 입에 넣으면, 어쩐지 물약으로 된 해열제를 나에게 떠먹이던 어릴 적 엄마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고 나는 곧 회복될 것만 같다. (27)

 

 


경주시 천군동 적산가옥

오빠는 내가 거울을 보지 못하도록 나를 가로막았다. 막으려는 마음으로는 하려는 마음이 행사하는 힘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힘센 오빠를 밀치고 나는 거울을 보았다. (34)

 

 


걸어서 그곳에 가기

피로감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공통 습성에 대해서도 한참이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를 피로하게 만드는 온갖 국면들에 대해서도. 오직 몸만이 피로한 여행지에서의 달콤한 걷기에 대해서도. (49)

'그래서 여행을 가는구나!' 알게 되었다.

 

 


조금 다르기

오래전, SNS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지기 시작할 무렵, 친구들을 만나면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만나는 건 반갑지만 만나서 할 얘기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오늘 점심 식사로 무얼 먹었는지를 이미 알고 있고, 요즘 무슨 책을 읽었는지도 다 알기 때문에, 어떤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까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건넬 수 있는 가벼운 인사말이 궁색해진다는 소회였다. (52)

 

 


간극의 비루함 속에서

아름다움에 매료되지만 아름다움이 어딘지 모를 비린내를 품고 있다는 것에 낙담하는 과정을 겪고, 괴로움인 줄 알았으나 괴로움이 종내는 비겁함의 다른 얼굴이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을 겪는다. (75)

 

 


기도를 잠시 멎게 하기

자장가 속에 담긴 야릇하고 평온한 약속에 기대어 아이들은 애써 붙잡고 있던 오늘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스르르 잠이 든다. 약속에 기대는 한, 아이에겐 기도가 필요 없다. 그렇게 기도가 무용해지도록, 기도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는 일. 그게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82)

 

 


나를 애태우는 '무'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 입으로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눈에 띄지 않은 어른들을 둘러보면, 거기서 존경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어딘가에서, 우리가 눈길을 자주 줄 리 없는 어떤 일을 평생을 바쳐ㅡ바친다는 마음도 품지 않은 채로 그저 스스럼없이 묵묵하게ㅡ하고 있는 이들. 그들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고 느낀다는 것은, 내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를ㅡ누구를 안 보고 있는지를ㅡ증명하는, 고작 그 정도의 말일 뿐이다. 보는 태도 때문에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쉽고 어리석다. 아니, 본다는 것은 쉽고 어리석다. 살아가면서 이런 유의 어리석음을 한 번도 겪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혼이 없는 사람일 것 같다. 영혼에 대해 따로 생각할 이유가 없을 만큼의, 오로지 영혼인 사람일 것이다. (87)

 

 


실수가 찬란해지는 일

생각이 짧았던 어린 시절의 많은 실수들은, 호기심은 왕성했으나 사고는 단순했고 현실은 예상을 빗나갔으나 대처 능력은 부재했기 때문에 빚어졌다. (95)

 

 


모든 이의 시점

이야기의 불일치는 어긋난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을 가장 제대로 보게 하는 유일한 방식일 수 있다. 우리 삶의 원래 모습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116)

 

 


막연漠然함에 대하여

간혹 낭독회나 시인과의 만남 같은 행사에 참여했을 때에 독자로부터 '당신의 시집 중에 어떤 시집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나는 번번이 첫 시집이라고 대답을 한다. 미숙했고 거칠었고 잘 몰랐지만, 그래서 마음이 간다. 인간이 잘 몰라서 하게 되는 일. 막막하지만 뭐라도 해보려고 애를 쓰다 쓰게 되는 시. 거기에 깃든 무구함은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감각 중 하나이다. (143)

 

 


아등바등의 다음 스텝

시를 쓰는 순간도 대략 비슷한 면이 있다. 한 문장씩 한 문장씩 써 내려갈 때에, 내 앞의 버젓한 무언가를 뚫고 걸어가는 느낌이 든다. 부여받은 재능이 없는 시인이라서 그 노고를 버겁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땅하다며 책상에 꼬박 앉아 있는다. (151)

 

 


얻기

인생을 만드는 것은 공식적 사건들 사이에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고,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계산 불가능한 일들이다. (179)

 

'무심코'라는 '아무런 뜻이나 생각이 없는' 행위 속에 깃든 무시하는 태도. 무시를 가능하게 만든 무지. 이러한 무지가 무력감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당연히 망가질 준비를 하게 된다는 것도, 하나하나 되짚으며 온몸으로 알아갔다. (182)

 

처음 코로나19가 우리에게 공포를 안겨주던 시작점을 생각해보면, 나는 잃은 것만큼 얻은 것이 많다. 시간을 얻고, 조금 더 나은 날씨들을 만끽하는 하루를 얻고, 내가 사는 동네의 모르던 장소들을 얻고, 그 장소에서 목격한,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결코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는 경이로움들을 얻었다. 경이를 발견할 줄 아는 겸손을 얻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184)

 

 


내일은 무얼 할까

꿈속에선 핸드폰을 사용한 적이 없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손전등이거나 가방이거나 우산이거나 지갑, 혹은 돌멩이거나 쪽지 같은 것인 적은 있어도, 카메라를 손에 든 적은 있어도 핸드폰을 손에 든 적은 없다. 핸드폰으로 어디에 전화를 건 적도 없고 받은 적도 없다. 당연히 SNS 어플을 열어 누군가의 게시물에 좋아요 같은 걸 누른 적도 전혀 없다. 내가 꿈속에서 누군가의 SNS 게시물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며 엄지손가락으로 피드를 죽죽 올리고 어딘가에 앉아 있는 장면 같은 건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다.
꿈속에서는 무엇이 궁금해지면, 길 가는 사람에게 묻고 물어 거기를 찾아간다. 종내는 두 눈으로 직접 궁금해했던 것을 본다. 직접 목격하게 될 때까지 헤매 다닌다. 직접 보고야 꿈에서 깬 적도 있지만, 보게 되기 이전에 꿈에서 스르르 깨어나버린다. 꿈속에서는 누군가의 집을 찾아가 그를 만난다. 그가 집에 없을 때도 있고 이사를 가버려 낙담할 때도 있지만, 또다시 그를 찾아다닌다. 누군가와 전화를 통해 목소리를 듣는다거나 약속을 잡는다거나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는 일을 하지 않는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우선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는 일은 현실 속의 내가 매일매일 낭비처럼 해대는 일이지만, 꿈속에서만큼은 단 한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직접 찾아 나선다. 그게 얼마나 멀든, 얼마나 경비가 들든, 내게 시간이 있든 없든, 전혀 상관이 없다.
꿈속에서 나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로션도 바르지 않는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바르지를 않는다. 외투를 입고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고 외출하지만 그게 다다. 꿈속에서 나는 집은 있는데 내가 사는 이 집이었던 적은 없다.과거에 살던 집이거나 전혀 다른 곳을 집이라고 여기며 편히 지낸다. 꿈에서 깨고 나면 그 장소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긴다. 가본 곳일거라 생각하고 오래 헤아려보지만, 알 길이 없다. 간 적 없는 장소가 꿈에 나타나 내 집이 되어주는 것에 대해서 언젠가는 알게 되면 좋겠다. (195)

그러네.
신기한 마음으로 천천히 읽은 글.
꿈에서 정말 휴대폰도, SNS도, 화장도, 포기도 한 적이 없네.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