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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 장강명
꼬마대장님
2022. 5. 1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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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는 매일 울면서 다녔어. 회사 일보다는 출퇴근 때문에. 아침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아현역에서 역삼역까지 신도림 거쳐서 가 본 적 있어? 인간성이고 존엄이고 뭐고 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다 장식품 같은 거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돼. (16)
반면 내가 직장인이 되자 한 사람은 유원지 밖에,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유원지 안에 있는 것 같은 상황이 됐어. 데이트 비용을 누가 내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어. 갑자기 연하 남친을 들인 느낌이랄까? 회사라는 새로운 환경이 적잖이 스트레스가 되고 누구 다른 사람 품에 안겨서 징징거리고 싶어질 때가 있었는데, 그런 때 지명이 별 도움이 못 됐어. 회사 경험이 없는 사람한테 그런 걸 털어놓는다는 게 좀 멋쩍잖아. 나름대로는 그게 지명을 배려한 거였는데... (54)
실제로도 신입 사원 연수 첫날부터 젊은 남자 직원들이 막 노골적으로 들이대더라고. 근데 참 이상해. 걔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지명이보다 훨씬 뻔뻔하고 무례하거든. 그런데 그게 또 끌리더라고. (55)
너무 젊잖아. 지명은 정말 괜찮은 애였지만, 난 연애를 딱 한 번만 해 보고 결혼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로맨틱 코미디에 나오는 이런저런 아슬아슬한 상황들을 겪어 보고 싶었어. 젊을 때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들 말이야. (62)
형서와 사귈 때만 해도 그냥 어쩌다 연하를 사귀게 되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후로도 줄줄이 연하 남자애들만 만났어. 게다가 애들이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금만 관계가 깊어지면 자기 가족이 어쩌고 사랑을 못 받고 자랐고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6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주에서 남자를 사귀면 사귈수록 지명이 생각나더라. 이상하지. 아니, 생각해 보니 이상하지도 않네. 시드니에서 사귄 애들 중에 지적 수준이나 인격 면에서 지명이보다 떨어지지 않았던 애는 한 명밖에 없었거든. (7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지루한 얘긴는 두 가지 뿐이었어. 은혜 시어머니 이야기, 그리고 미연이 회사 이야기. 그런데 은혜랑 미연이 그 두 얘기를 너무 오래 하는 거야. 몇 년 전에 떠들었던 거랑 내용도 다를 게 없어. 걔들은 아마 앞으로 몇 년 뒤에도 여전히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을 거야. 솔직히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없는 거지. 걔들이 원하는 건 "와, 무슨 그럴 쳐 죽일 년이 다 있대? 회사 진짜 거지같다, 한국 왜 이렇게 후지냐."라며 공감해 주는 거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냐. 근본적인 해결책은 힘이 들고, 실행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니까. 회사 상사에게 "이건 잘못됐다."라고, 시어머니에게 "그건 싫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무서운 거야. 걔들한테는 지금의 생활이 주는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이 너무나 소중해. (121)
정말로 화자의 이야기를 따라 읽다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같은 내용을 되풀이 하여 하소연하는 친구들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정말 자칫하다가는 나도 저럴 수 있겠구나, 아찔했다.
"아니, 그러면 지금 다 말할게. 딱 2분만 시간을 내줘. 나 너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그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 걸었어. 나, 오늘로 만 서른이 됐어. 하루 종일 생각했어.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런데 결론은 너였어. 내가 인생을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은 너 하나 뿐이야. 너더러 당장 한국에 돌아오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난 여기서 계속 너를 기다리려고 해. 평생을 기다려도 괜찮아. 사랑해, 계나야."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가슴이 진정이 안 되게 두근두근 뛰는 거야.
얘는 내가 지금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는 건가? 무슨... 마치 자기를 구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하며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같았어. 낙하산을 멘 건지 아닌지도 몰라. (138)
ㅎㅎㅎ 2년 전이던가, 내가 지형에게 전화를 걸던 때가 떠올랐다.
'남은 돈이 얼마지.' 걱정하지 않고 돈 써 본 것도 내 평생 이때가 처음이었던 거 같네. 내가 돈 쓰는 걸 주저하면 지명이가 막 지갑 열어서 나한테 묻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물건 사고 계산하고 그랬어. (142)
걔 얼굴이 과로와 수면 부족 탓에 검고 거칠거칠했어. 입 주변이랑 턱에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올라와 있더라. 이불을 덮기 전에 본 배는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있었어. 얘가 아저씨가 됐네, 하고 정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더 짠하고 아프고 그렇더라고. 얘 이렇게 일하다 암 걸리는 거 아닌가 싶고, 내가 이 모습을 10년이고 20년이고 보다가, 그냥 얘는 매일 이렇게 열몇 시간씩 일하는 애다,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게 되면 어떻게 하나 싶고... 막 눈물이 날 것 같았어. (156)
전 직장에서 지형이 일할 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너없이 지내는 상상이 안되는데'라는 생각까지 닿아 눈물이 났었다.
계나도 지명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동화책의 마지막 문장을 입 밖에 내어 말했어. 내 목소리를 들은 지명이 몸을 잠시 뒤척이며 신음하더라.
친구 펭귄들이 파블로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을까? 그냥 참고 살라고 말이야. 다들 그렇게 산다고. 파블로한테는 헤어지기 어려운 피붙이나 애인은 없었을까? (158)
"똑같이 하와이에 왔다고 해도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떤 펭귄이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자기가 도착한 섬에 겨울이 와도 걱정하지 않아. 또 바다를 건너면 되니까. 하지만 누가 헬리콥터를 태워 줘서 하와이에 왔다면? 언제 또 누가 자기를 헬리콥터에 태워서 다시 남극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160)
지명은 고개를 숙인 채 내 얘기를 들었어.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내가 오히려 묻고 싶었지. 너는 왜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 거야? 나 따위가 뭐라고 나한테 평생을 걸어? 너무 고맙고 미안했어. 하지만 고맙고 미안하다는 이유로 내가 네 옆에 있을 수는 없어... (161)
밥을 먹는 동안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애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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