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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나무 숲 :: 권여선

꼬마대장님 2022. 5. 16.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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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속 응달

14년 전 그녀는 거울 속에서 무엇을 보았던가. 다들 떠나버린 대학원 연구실 거울 앞에서 아무 목적 없이 자기 얼굴만 물끄러미 들여다보았을, 시리게 젊으면서도 그런 줄 몰랐을 스물 여덟의 자신을 떠올리자 딸처럼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199)

 

 


진짜 진짜 좋아해

휴학을 하고 나서 모든 걸 의무가 아닌 취향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되자, 나는 대학이라는 공간이야말로 내가 하루를 가장 유익하고 쾌적하게 보낼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은, 거기에 소속되어 들볶이지만 않는다면, 도시의 그 어떤 공원보다 편안하고 매력적인 장소였다. (234)

정말!! 
그런 모종의 그리움으로 나도 석사를 갈망했고, 올해는 시작했다. 

어쩌다보니 아직 학교는 한 번도 안 가보았지만(입학 시험을 치기 위해서 간 것을 제외하면), 궁금하고 기대된다. 서울에는 내가 다닌 대학교가 없었는데 이제는 생긴 거니까. 내가 그리워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거니까. 

어제는 지형을 조수석에 태우고 밤 드라이브를 꽤 길게 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순간에 데려다 주는 차라니. 
맥도날드 DT에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무사히 사고(!) 달리는데 지형이 물었다.
"현아, 어때? 자유롭다고 느껴?"
응, 진짜 그랬다. 조금 차가운 밤 바람이 마구 머리칼을 헤집고 볼을 부비는데,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그럼 조금 더 빨리 밟아봐. 80까지는 괜찮아."라는 지형의 말에 속도를 내보았다. 

서울이 아닌 도시여서 23시를 넘긴 밤의 도로는 한적했고, 나는 내가 밟는 만큼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차로 내가 다니는 대학을 가게 된다니, 괜히 더 기다려진다. 

왕보가 차를 기다리며 보였던 모습이 지금의 나랑 비슷했을까?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무지 노력중인데 나만은 안다. 내가 차를 무지 기다리고 있음을.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타인과 같은 방을 쓰며 쌍둥이처럼 바짝 붙어 지내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형제와는 이미 끝났고, 애인은 아직 없고, 결혼은 너무 요원한 시절, 그렇게 이십대에 경험하는 친구와의 길거나 짧은 동거생활 같은 것 말이다. 스물한 살의 후반부 넉 달 동안, 경은과 나는 대단히 유난스러웠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특별한 룸메이트이긴 했다. (235)

어... 교야랑 보영이 떠올랐다. 
어떤 특정한 시기에 누구랑 같이 '산다'는 건 새로운 관계가 되는 일 같다. 그것도 일시적인 게 아니라 영구히. 

지금도 교야랑 그 어떤 공통점도 없지만, 편하게 연락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다 그때 그 시간의 힘이겠지. 왕보도 그렇고. 
내 인생에서 타인과 방을 쓰며 쌍둥이처럼 붙어 지내는 시기가 보영으로 끝이라니 조금은 아쉽기도. 
그래도, 오늘 정아 보영과 목동 마라탕을 먹으며 이야기했지만 주기적으로 만나 지금처럼 지내고 싶은데. 내 욕심일까. 
욕심이 아니게 내가 부단히 노력해야겠지. 더 세심해야겠지.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두 정류장 남짓한 거리를 걸었다. 적당한 보폭으로, 내가 지나치게 고독하고 우울하고 허기지지 않도록 조금씩 나를 달래는 방식으로 소삭소삭 걷다 보면, 밤의 산책은 독서로 혼미해진 내 영혼에 가느다란 실금을 내고 그 사이로 신선한 바람을 살그머니 들여보내주었다. 그 당시 내가 매일 밤 40분 넘게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튼 나는 뭔가 밤의 세례를 받고 씻기고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으며, 혼돈된 사색 속에서 우주라든가 신, 불멸 같은 불분명하고 추상적인 테마들을 사유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런 사유를 통해 내가 내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느낌을 얻었다. (246)

 

하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시큰둥한 짜증과 무료함이 그 애의 표정이나 몸짓 어딘가에 즙처럼 잔뜩 고여 있었다. 어느 순간 그게 주르륵 흘러내리는 바람에 나는 종종 놀라곤 했다. (250)

 

그 애 엄마 얼굴에는 언제 봐도 신경질적인 다급함이 깃들어 있어 나는 괜시리 숨이 가빴다. (252)

신경질적인 다급함. 어떤 얼굴들이 떠올랐다. 아마 학교에서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에 해당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정확히 이와 대척점을 이루는 자가 있었으니... ㅂ부장님. 
그래서 그가 더 돋보였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하고 같이 있는 게 좋았다. 

언젠가 정혜윤 피디님의 책에서 본 표현처럼, 아무리 급하고 짜증스러운 일도 그에게 들어갔다 나오면 더 순한 일이 되어 있었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바뀌는 건 아니지만 뜨거움은 사라져있어 만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그와 비슷하고 싶은데... 이게 아무리 늘 자각을 하고 있어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V템포V쉬기가V참V어렵다V.

 

늘 단둘이 지내다시피 하고 거의 매일 단둘이 술을 먹는데도, 서로 나눌 얘기가 부족하다든가 상대가 점점 지겨워진다든가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은과 내가 썩 잘 맞는 스타일이었냐 하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식성도 다르고 옷에 대한 취향도 다르고, 어떤 인물에 대해 품평을 할 때도 의견의 일치를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도 나로서는 경은과 함께 지내는 게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막상 겪어보면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 그런 삶도 있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경은과의 생활은, 나와 아주 잘 맞는 어떤 사람과 사는 것도 그보다 나을 수는 없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편안하고 수월했다. (254)

상아랑 보영. 

또 공교롭게도 이 둘은 사촌지간. 
내가 상아의 외가 그리고 왕보의 친가와 잘 맞나보다. 

 

경은과 나는 그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그가 좋아할 만한 얘기들을 경쟁적으로 쏟아놓았다. 우리 셋의 술자리는 너무나 유쾌하기 짝이 없었는데, 다소 기묘한 것은 자꾸자꾸 유쾌해지려다 보니 모든 얘기들이 점점 더 사납고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258)

어 최근에 내가 S와 만나면서 느꼈던 감정. 

나도 모르게 자꾸 경쟁적으로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 놓게 되어서, 중심을 잃고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귀결을 맞이 한 것 같다. 그래서 자꾸 뒷맛이 씁쓸한 만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달까. 

왜 내가 편히 말하지 못하고 어떤 무언의 기대감과 만족감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 앞에서는 대개?
지금 잠시 생각을 해보자면, 그가 어떤 즐거움을 늘 희구하고 그것을 늘 내비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고민이나 힘듦을 지나치게 외면하는 나머지, 그것과 가까운 것을 절대 내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나의 책무(?)가 발현된 게 아닐까. 가장 그럴싸한 가정이라고 생각이 든다. 
사실 다른 결로 비슷한 대화의 흐름이 H에게서도 나타나는데, 그래서 이 둘을 만날 때면 나는 미리 '대화거리'를 떠올려보고 간다. 대충 2-3시간 정도는 떼울 수 있을... 
객관적으로 쓰고 보니 참 기이해보인다. 그치만 그 개인들은 좋은 사람이라, 쉽게 맺음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 

어려운 관계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시간을 더 들여보지 뭐. 

 

정작 이상한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곱씹어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경은과 어떻게 헤어지기로 합의했는지, 방의 짐은 어떤 식으로 뺐는지, 그 후 교정에서 우연히라도 만났을 텐데 그때 우리가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궁금증이나 죄의식이나 고통도 없이 경은을 잊었고, 경은과 함께 지낸 그 시절도 잊었다. 심경은이라는 아이가 내 인생의 그래프에서 자신과 함께 지낸 시간 토막을 딱 잘라가지고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는데도,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생각도 없이 지금껏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다. (중략)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는 순간 증기처럼 아득한 두려움이 나를 덮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 토막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을까. 진짜는 죄다 도둑맞고,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아의 금고 속에는 엉뚱한 모조품만 잔뜩 쟁여져 있는 느낌이다. (262)

진은언니가 갑자기 떠올랐다. 
나도 잘 기억이 안 난다. 내가 무척 좋아해 따랐던 언니인데, 어떻게 언니가 사라졌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심지어 진은언니가 아닌, 기억도 안나는 모(某) 또한 있겠지? 
어디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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