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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곳으로 가자 :: 정문정

꼬마대장님 2021. 9. 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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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을 자꾸만 마음에 품게 되고 말을 걸고 싶어지는 이유는 결국 그들에게서 과거의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8)

 

경험해보지도 않고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고 단정하지 않기, 의견과 편견을 구분하기,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악한 짓만 아니라면 비난하지 않고 다만 궁금히 여기기. 이런 노력을 통해 제대로 좋아하고 분명하게 싫어하고 싶다. 깊어지고 넓어지며 자주 감탄하기 위해서. (38)

다만 궁금히 여기기

나직이 입으로 읽어본다. 

 

그렇게 뜨거웠던 것이 시시해질 때 우리는 성장해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다. 그러니 누군가의 팬이었던 역사는 저마다의 세계에 대한 투쟁기이자 성장담이기도 하다. 그러니 정작 덕후에게 중요한 질문은 '왜 입덕하였나'가 아니라 '왜 탈덕하였나'가 된다. 간절했던 마음이 끝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자신을 이해하고 과거의 나와 화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삶을 견디기 위해서 무엇이 절실했던 걸까?' (44)

 

"지금의 모습이이 되는 데 부모로부터 어떤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유산이라고까지 할 만한 건 없는 것 같아요. 어릴 때 제 주변엔 닮고 싶은 어른이나 가르침을 주는 분이 많지 않았어요."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서 책을 열심히 읽었어요. 책에는 닮고 싶은 사람이 많았거든요." (45)

 

대학 때 어느 교수님이 운전하는 차에 탄 적 있다. 나는 그전까지 어른의 차를 거의 타보지 못해서 이런 경우 옆자리에 앉는 것이 예의인지 몰랐다. 별생각 없이 뒷자리에 앉았다가 "내가 네 운전기사니?"하며 못 배운 놈이라고 교수님의 분노를 산 적 있었다. 욕을 배불리 먹으며 억울했던 기억이 난다. 아, 못 배운 건 맞긴 한데, 이건 진짜 안 배웠는데...... (48)

부끄럽게도 나 또한 24살에 처음 학교에 근무하면서 알게 되었다. 하하.. 진짜 못 배웠고 안 배웠는데... 하하 

 

물려받은 재산 없이 일가를 이룬 자수성가형 인간을 영어로는 '셀프 메이드 맨(우먼)self-made man(woman)'이라 부른다. 나를 만드는 건 셀프, 나는 이 표현을 아주 좋아한다. 부모의 정보력과 인맥, 매너가 대물림되는 세상이지만 그걸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울고만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압도될 필요도 없지만 그런 것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애써 무시해버리지도 말자. 내게 주어지지 않은 걸 아예 필요치 않은 것처럼 대하는 식의 대응이 반복되면 시니컬한 자세가 인생을 사는 전반적인 태도가 된다. 그저 담담하게 찾아서 내 근처로 걸어오면 된다. 주변에 책 같은 사람이 없다면 책을 통해서라도. 시간이 더 걸릴지라도 견문을 넓혀 그것들을 내 정서적 서재에 꽂아두면 된다고, 아직까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50)

 

나는 이렇게 메모했다. '<기생충>을 보고 느낀 것: 약해지면 악해지기 쉽고, 강자는 악의 없이 상처 주기 쉽다.
전날 밤 폭우로 인해 집이 침수되어 체육관에서 눈을 붙이고 온 송강호가 간신히 운전대와 정신을 붙잡고 있을 때 뒷좌석에서 조여정은 친구와 통화하며 이렇게 말한다. "비가 와서 미세먼지도 없고 좋네." 지난밤 조여정의 집에서는 앞마당에 친 아이용 텐트조차 멀쩡했다. 때문에 그는 이 말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 못한다. 송강호의 영혼이 파사삭 바스러진 순간은 어쩌면 바로 그 해맑음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여유와 교양 있는 사모님으로서의 미덕을 내면화한 이로, 아랫사람에게 불만을 대놓고 말하지 않는 조여정은 그의 퀴퀴한 냄새를 맡은 뒤에도 지적하지 않고 조용히 창문을 열 뿐이다. 나름의 배려심이 있고 악의 없는 그였지만, 가난에 대한 상상력은 없었으므로 결국 한 인간에게 상처 주었다. (53)

 

돈이 가져다주는 장점 중 하나는 환경이나 상황과 괴리되어 쾌적함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힘들고 더러운 일은 외주를 주고 그렇게 산 체력과 시간으로 일상의 뽀송뽀송한 상태를 유지한다. (53)

정말 뽀송뽀송하지. 

물론 글의 맥락에서는 이것을 우호하는 뉘앙스가 아니지만, 이 부분은 공감할 수밖에 없어서.

 

 

영화 <기생충>에서 그리도 강조하는 '선을 지키라'는 말은 결국 예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예의는 약자에 대한 상상력에서 나온다. 우리가 어떤 계급에 가깝든지 꼭 가져야 할 태도는 바로 이것이다. (56)

15개정 교육과정에서 새롭게 보이는 단어이기도 하다. '도덕적 상상력' 뭐 쉽게 말하면 '상상력'.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추상적일 수는 있겠지만, 매년 수업을 준비하고 수업을 하다보면 느낀다. 
이 단어가 가진 함의를. 

예전에는 감수성이 비슷한 사람이 좋다고 말했는데, 
더 정확한 표현을 찾았다.
'상상력'이었다.

결국 내가 라샘과 영혼을 나눌 수 있는 것도, 같은 장면을 보고 같은 상상에 가닿기 때문.
그러네. 상상의 차이에 따라 배태되는 감정과 태도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특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했던 적은 또 있었다. 나는 한때 TV가 싫었고 그걸 많이 보는 사람조차 싫어했다. 특히 보는 사람이 없는데 TV가 켜져 있으면 머리가 아팠다. 고향에서 떠나와 혼자 살게 된 후에야 알았다. 그 불편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내가 진짜 싫어했던 건 TV가 아니라 항상 그 소리가 들리던 집이었다. (중략) 조용한 자취방에서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진짜 멀어지고 싶었던 건 TV가 아니라 집이었구나. (62)

 

나에게도 울기만 하던 밤이 있었지. 나카지마 아츠시의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에는 재능을 의심해본 이가 공감할 만한 표현이 있다. 시를 잘 썼던 인물 이징이 호랑이로 변해 산속에 숨어 살다 옛 친구를 만나 한탄하는 장면에서다.

나는 시로 명성을 얻으려 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아가려고도, 친구들과 어울려 절차탁마에 힘쓰려고도 하지 않았다네. 그렇다고 속인들과 어울려 잘 지냈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네. 이 또한 나의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해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던 것이라네. 

닦아봤자 결국 구슬이 아닌 걸 들킬까봐 노력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구슬일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기도 어려웠다는 고백이 마음을 찔렀다.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인생을 허비했다는 탄식에 공감하는 사람이 나뿐 아닐 거다. (68)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그의 재능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흔들려가며 자신의 일을 하는 데 있다. 강사의 말처럼, 그는 울면서 '하는' 이다. '울기만' 하는 이가 아니라. (옮: 봉준호 감독을 말하는 부분이다)
어쩌면 재능이란 영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로 돈을 못 벌 것 같으면 해야 하는 일로 돈을 벌어서라도 좋아하는 일을 놓지 않는 꾸준함에 깃드는지도 모른다. 뒷골목에서 헤매고만 있는 것 같아 비참해지는 순간이 자주 오겠지만 울며불며 하다보면 생각 못한 순간 언저리에라도 도착할지 모른다. 그러다 또 언젠가는, 그 대단한 재능의 비결이 뭐냐고 물어오는 후배가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 애매한 나를 견디는 법은, 엉엉 통곡할지언정 일단 목적지 근처라도 가서 맴도는 데 있다. (69)

애매한 나를 견디는 것이 요즘 내가 근근이 해내는 일을 말하는 것 같다. 

 

무조건 서울에 가야 한다, 서울 가야 답이 있다, 같은 말을 주문처럼 외우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간절했던 서울에 살게 되면서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여기저기 '시내'가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을 빠르게 볼 수 있고 독립영화관이 여럿 있고 각종 강의나 문화 행사가 자주 열리는 곳, 새로운 외식 브랜드나 복합문화공간이라 할 만한 곳은 언제나 서울에 1호점을 열었다. (70)

내가 가진 특유의 조급함(?)을 잠재워주는 소중한 이 도시. 

 

인생의 주요 시기를 드라마 시즌제처럼 나눌 수 있다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부모의 자식으로 사는 시즌 1, 독립해 사는 시즌 2, 자식의 부모로 사는 시즌 3 정도로. 첫번째 시즌의 가장 큰 비극은 어쩌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극도로 좁다는 것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시기에 어느 곳에서 무언가를 물려받고 태어나 부모의 취향과 육아 방식에 맞춰 성격이 정원처럼 다듬어진다. 인간 관계 또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주어진 것이다. 동네 친구와 다니는 학교와 학원에서 알게 된 친구들. 그런 면에서 사람이 스무 살 이전에 이룬 성취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자기 노력 덕이라 하긴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같은 논리로, 스무 살 이전의 실패 또한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겠지. (72)

 

조연과 배경이 바뀌게 되면 주인공은 그에 맞춰 새롭게 말하고 행동할밖에. (중략) 새로운 삶을 원한다면, 이처럼 익숙하지만 갑갑함이 있는 관계에 쏟는 에너지는 약간 줄이고 낯선 곳을 찾아가는 일이 도움이 된다. 기분 좋은 어색함이 있는 곳으로. (73)

 

핵심만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 긴 글을 읽고 길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74)

ㅂ부장님과 라샘이 떠올랐다. 

 

내 경우에는 리더로 믿을 사람을 측정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그리고 이런 거름망은 누구에게나 하나쯤 필요하다. 
첫째, 말과 행동이 달라 헷갈릴 때는 행동만 보자. 그럴싸하게 말하기는 쉽다. 말과 행동이 같기란 어렵다.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다를 경우, 자꾸 말을 믿으려 하지만 말은 그 사람이 아니고 행동이 바로 그 사람이다. (후략)
둘째, 성공의 원인을 자기 능력에서만 찾는 사람은 믿지 않는다. (중략) 성공한 이들 중엔 개인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마다 출발선이 다르므로 운도 그만큼 중요한 요소란 걸 인정하는 정도가 정확한 현실 인식에 가깝다. (83)

 

시간이 흐르고 눈에서 멀어져야 다시 보이는 상황이 있다.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애정이나 지원 때문에 스스로를 결핍 덩어리로 여긴 시절이 있었다. 나라는 캐릭터가 이 중대한 결함 때문에 주인공 옆에서 배경만 되다 사라지지라 예감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해석한다. 그 덕에 얻은 억척스러움이 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선 원동력이었다고. 연애도 마찬가지. 사랑이 끝날 때마다 문제를 복기하며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진짜로 원하고 편안해하는 사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친구 관계에서도 멀어지는 당시에는 섭섭했지만 이제 안다. 그 아이가 달라진 게 아니고 나의 상황과 관심사가 변한 것이며, 그에 따라 자주 보고 싶고 편안한 이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걸. (88)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으로 해석하는 걸 멈추지 않으면, 과거와 싸우는 데 몰두하느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로써 얻은 자기연민이 지나치면 그에게 사랑을 주던, 건강한 정서를 가진 주위의 사람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나간다. 불행한 마음을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며 걸신들린 듯 관심과 배려를 갈구하기에 상대에게서 감정의 끝장을 보고야 마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이 불길한 예감은 자주 맞아떨어지는 예언이 된다. 상처에 압도되어 자기를 불신할 때는 그 뜨거움을 주변과 나누려 하지만 그럴 때의 불행은 전염되기만 하지 줄어들지는 않아 도리어 자꾸 외로워진다. (89)

정말 잘 알기 때문에 정말 조심하는 모습. 

 

삼 년 정도를 큰 탈 없이 버텼다는 건 어느 정도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딴생각이 들기 시작한다면 이력서를 매년 새롭게 써보고 채용 공고를 꾸준히 확인하는 게 목표 설정에 도움이 된다. (후략)
한편, 회사 동료와 밖에서 만나는 일을 최대한 줄였다. (중략)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 공통된 화제가 회사일 외엔 없어서 필연적을 자리에 없는 사람이나 시스템 욕을 하며 위안을 얻는다. 보통 그런 대화는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는 위안으로 끝나버리지, 현실을 개선할 의지로 연결되지 않는다. 반복될수록 패배감과 적대감이 치석처럼 들러붙어버리는 것만 같다. (100)

 

우리가 보통 분노를 이기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듯한 무력감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일정 부분 다독여졌다. 혹독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이를 표현하거나 잠시 덮어둘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내 경우는 그게 글이었다. (112)

나도 독서 내지는 글 아닐까? 아직은.

 

상사 때문에 너무 괴로울 때, 협업하는 상대와 성향이 너무 맞지 않을 때, 언젠가 끝날 거라 생각해보자. 다시는 안 봐도 되는 사람에게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자. 안녕이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약간 더 관대한 마음이 드니 이상한 일이다. (134)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말을 글로 옮기는 생활을 하면서 나는 서서히 세상의 희망적인 면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생각과 그러니 해봤자 안 될 거라는 두려움으로 우울해하는 밤이 많았다. 불운했던 과거에 짓눌려 있을 때가 잦았는데 중요한 건 내게 일어난 사실 그 자체가 아니고 그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대단해 보였던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알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다는 말에 수긍하면서도 나만의 그림자는 유독 고독하고 길게 드리워 있다 여겼는데 딱히 그렇지 않다는 자기객관화도 됐다. "너의 고통은 특별하지 않다"고 누군가 말했다면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 테지만 스스로 깨닫는 과정에서는 수긍이 되었다. 어떤 사람과 한 시간 이상 마주앉아 인터뷰를 하다보면 알게 된다. 누구든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혐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그걸 알아차릴 정도로 타인에게 집요하게 질문하지 않으니 모를 뿐. (155)

 

내 경우엔 어떻게 일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며 타협점을 찾는 과정에서 바뀐 태도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가까운 사람이 한 비판이 아니면 치명상을 입지 않게 되었다. 전에는 비판을 받는 사실 그 자체가 힘들었는데 일을 하면서 알았다. 칭찬보다 비판이 더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에 지적부터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결과물이 인기를 끌수록 비판의 목소리도 커진다. 온라인 콘텐츠를 만들 때 조회수와 댓글의 상관 관계를 분석해보면 조회수와 악플의 수는 비례했다. 조회수가 낮으면 좋은 평가만 있거나 반응 자체가 없었다. 비판을 받으면 검토하되 그게 다수 의견은 아니며 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공격 또한 아니라고 생각하는 맷집을 키웠다. (161)

 

일단은 말랑한 마음으로 조언을 구하고, 바깥의 이야기들을 참고한 후에 얻어낸 사금은 품고 잃지 말자. 이 과정에서 약속된 땅이라는 게 있다면, 그 모든 외로움이 겪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회고하게 되는 순간이 한번쯤은 있으리라는 거다. (163)

 

아동학대 기사를 읽다 발견하고는 깊이 공감하며 메모한 표현이 있다. "우리는 살해된 아이의 진술을 들을 수 없다. 동반자살은 가해 부모의 언어다. 아이의 언어로 말한다면 이는 피살이다. 법의 언어로 말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살인이다." 울산지법 박주영 부장판사의 판결문 일부다. (174)

 

그후 나는 책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를 읽다가 가난하게 살아간다는 건 정보에 접근할 기회가 적다는 것을 의미하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실(예컨대 예방접종을 하면 홍역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대목과, 가난하면 내일보다 오늘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기에 목표까지 가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게 되며, 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글에 밑줄을 그었다. (190)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녀의 어둠은 연애에서 자주 깊어졌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마치 남자친구를 통해 채우려는 듯 끝없이 연애했다. 그러지 않으면 외로움이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잘 알게 된 후 연애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연애를 시작하면서 상대를 알아가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왜 이렇게 이상한 남자만 만나게 되는 걸까?'하는 고민이 언제나 머릿속을 휘저었다. (중략)
퇴근길에 들렀다는 예비 신랑이 들어와 목례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목례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는데 노골적인 눈빛이 불쾌했다. 대화중 그는 자신이 굉장히 자신만만한 사람임을 과시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거들먹거렸다. 그리고 초면인 내 앞에서 후배를 면박 주었다. "얘가 좀 무식해서요" "애엄마 되면 좋은 시절은 다 끝났죠"같이 그녀의 자존감을 짓누르는 말들. 그녀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그저 웃었고, 나는 그녀가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것 같아 보여 속상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나에게 고민상담을 했던 연애 상대들은 대개 고만고만하게 별로였지만 이 사람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인 것 같았다. (214)

ㅁㄱ언니 청첩장 받는 날이 생각나기도 했고, ㅅㅇ가 생각나기도 했고, ㅂㅇ가 생각나기도 했다. 

 

시바타 쇼의 소설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이 몇 종류인가 있을 거야, 분명.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자기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는 거지. 정말로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면, 그건 너무 잘 맞아서 쉬이 익숙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행복과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중략) 이런 습관에서 벗어나려면 잘 아는 불행과 모르는 행복 사이에서 애써 후자를 고르는 연습을 해야 한다. (216)

잘 아는 불행과 모르는 행복 사이에서 애써 후자를 선택하는 일. 

 

어른이 되어갈수록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 기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조금씩 구비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누군가를 만날 때도 설렘이 줄어들게 된다. 그럼에도 이런 마음까지 해제시키는 이를 만났다는 건 헤어지더라도 평생 회고할 가치가 있는 사랑을 해보았다는 의미다. (219)

 

남편의 행동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낀 일들은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들이었다. 나만 선심 써서 봐준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약이 올랐는데, 그 역시 내가 이상해 보일 때가 많았지만 나름대로 이해하려 노력했다는 것도 새삼 알았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 분노하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할까?'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른 걸까?' 궁금히 여기는 데서 시작하면 부정적인 감정을 줄일 수 있다. 서로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지점이 충돌할 대 우리는 자주 불화한다. 우리는 막연히 '상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226)

 

우리집이라 불리는 곳이 생길 때의 안정감이 이렇게 큰 거였구나. 사랑과 배려가 탄수화물에서 나오는 거라면 평온함은 '집'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전보다 무엇에든 화가 덜 나는 나를 보며 사람도 고양이만큼이나 영역동물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229)

 

저렇게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한테도 상처가 있다고? 세상 누구도 나보다 아플 것 같지 않은데 혹시 저 사람도 같은 생각을 하면서 나를 바라볼까? 얼굴에만 상처가 없다 뿐이지 등이나 엉덩이나 가슴에 있어서 옷으로 가린 채 살아가는 걸까? 소설 제목같이 '구경꾼'처럼 나를 지켜봤다. 괴로워하고 분노하는 이 감정이 지나치게 격렬한 건 아닌지,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긴다고 말하는 부정적인 현실 인식에 갇혀 시야가 희끄무레해져버린 건 아닌지 살폈다. 그즈음부터 남들이 티내지 않아도 품고 있을 상처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 실제로 그런 내심이 하나씩은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놀라웠고 위로가 되었다. (242)

내가 늘 유념하는 것. 

이건 정말로 큰 위로가 된다.

 

"너 저번에 했던 그거 기억하지? 막상 해보니 할 만했잖아. 그러니까 이것도 한번 해보자"고 말을 걸 때 과거의 근거들이 많으면 설득하기 수월하다. (245)

 

남편은 내가 아는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이다. 열등감이 없고 꼬여 있지 않으니 누군가를 볼 때 좋은 면만 보려 해 남의 험담을 거의 하지 않는다. 사람의 급을 나누거나 돌려받을 걸 계산하지 않아서 누구에게나 잘해주지만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진 않는다. (249)

지형이도 내가 아는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콤플렉스가 없다. 가장 건강해서, 옆에 있는 나마저 건강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래서 나는 지형이를 오래 선망했고 오래 좋아했다. 지금도 지형이가 제일 멋있는 이유. 

 

전에는 타고난 사회적 조건에 따라 열등감의 정도가 정해지는 거라 여겼는데 신기하게도 열등감에도 1인분씩 총량이 정해져 있었다. (251)

 

정말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고통에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뛰어넘었고 더이상 그 흉터에 집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승리자들이니까. 과거의 어둠은 베이스 캠프에 묻어두고서 더 위쪽 좋은 것들이 기다릴 풍경으로 담대하게 걷겠다고 결심하는 탐험가들이니까. (253)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대처하는 법>을 재밌게 읽어서(그러고 보니 벌써 5년 전에 읽었.....네..), 두번째 책인 이 책을 구입해 읽었다. 

그때는 재밌게 읽은 부분이 대다수였는데, 이번엔 그냥 저냥. 아주 별로이진 않았지만 아주 재밌지도 않은.
그때는 즐거운 강연을 듣는 기분이었다면, 이번엔 괜찮은 사람과 수다를 떤 기분. 

잘 읽었습니다. 정문정 작가님.

이제 더 좋은 곳으로 가보려고요! 

정상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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